많은 이들이 “이것은 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적지않은 이들이 ‘시민혁명’이라고 떠들고 있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펼치고 있는 낙선·낙천운동에 대한 평가다.

그러나 아직 피는 흐르지 않고 있다. ‘최루탄의 나라’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고 있다. 불안한 것은 여의도에 있는 그곳, 금뱃지를 향해가는 국회의원, 그리고 의원 후보들의 얼굴이요, 목소리일뿐이다.

나라안이 어지러울 때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내일이 불안할 때는 ‘어제는 어떠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속에 떠오른 것은 전 한미연합사령관 존 위컴 예비역 대장의 1999년 12월28일 나온 회고록 ‘12·12와 미국의 딜레마’.

위컴은 1950년 웨스트 포인트를 나와 1960년대에 한국의 비무장지대에서 대대장을 지냈다. 그가 미8군 사령관 겸 한미 연합사령관이 되어 한국에 다시 온 것은 1979년 7월. 10·26, 12·12, 광주항쟁, 전두환 대통령 취임과 미국 방문 등을 1982년 6월까지 겪었다. 그리고 1983~1987년 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며 41년간 군복만을 입었다.

위컴의 회고록은 여느 장군의 회고록처럼 무용담이나 전공이나 전투를 다룬 것이 아니다. 아주 드물게 주둔 동맹국의 연합사령관으로써 ‘정치적 격동기’에 사령관으로써 해야 할 임무와 그 한계를 서술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회고록에는 미국의 국가이익인 ‘동북아에서의 평화유지’를 위해 주한 미군이 지켜야 할 임무와 편이를 지키기 위해 한국이 지향하는 ‘민주화’에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할 것이냐는 고민이 담겨 있다. 이런 고민은 12·12와 광주항쟁 당시 그의 산하에 있던 한국군이 동원되었기에 역사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 문제의 꼬리는 새천년, 새세기의 문턱에서도 ‘혁명’이니‘시민혁명’이니 하며 멈춰있다.

위컴은 이번의 ‘혁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회고록의 결론 부문인 회고의 대목에는 한국 국민, 시민의 저항과 항쟁 등 변혁에 대한 그의 고찰이 담겨있다. 1979년 12월12일의 밤을 8군 벙커에서 보낸 위컴은 그날의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12·12 쿠테타를 기습적으로 당했다. 미국적인 생각에서 나는 한국 국민이 자신의 자유가 훼손된 것에 가시적인 분노를 나타낼 것을 기대했다. 한국 국민의 대체적인 수동적 태도에 나는 놀랐다. 12·12 사태이후 한국 국민은 정치권력의 불법적인 탈취와 비상계엄의 실시를 통한 자유의 상실을 받아들였다. 내게 있어 압제를 용인 내지 체념하는 그들의 태도는 놀랐고 실망스러웠다.”

실망한 위컴은 전임자 존 배시 장군(레이건 행정부때 합창의장)이 준 폴 크레인의 ‘한국적 형태(Korean Patterns)’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책 머릿장에는 “이 책은 이 자리에 앉는 사람(주한 미군 사령관)의 필독서”라고 쓰여있었다.

‘한국적 형태’는 20년간 전북지역에서 의사로서 선교활동을 한 크레인이 쓴 책이다. 한국을 이해하고픈 외국인을 위해 한국인의 전통, 관습, 가치관, 인격 등 한국 문화에 대한 소개가 주내용이다. 정치문화에 대한 분석도 있다. (1967년 한림사 발행)

크레인의 책중에는 위컴에게 가슴에 와닿는 대목이 있었다. “한국인의 가장 큰 덕목 중 하나는 고난을 이겨내는 능력이다. 한국은 생존을 위해 참고 견디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의 땅이다. 피할수 없다면 그들은 압제와 부패, 부정, 그리고 육체적 고통을 조용히 인고한다. 그들은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된 그날을 꿈꾼다.

한국 문화에는 추상적인 원칙에 얽매이게 하는 도덕적·종교적 가르침의 틀이 없다. 생존을 위한 조치라면 어느 것이든 대체적으로 옳다고 여긴다.”

위컴은 크레인이 지적한 한국인의 ‘기꺼이 견디려는’습성에 동의했다. 또한 미국의 많은 정책도 한국인의 이런 ‘인종’에 근거해 한국 정부의 정치·군사적 조치에 관용적이었다고 분석했다. 위컴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미국은 유혈과 북한의 개입위험을 무릅쓰면서 전두환 축출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 국민에게 대해 저항할 것을 적극 권장하지 않았다. 전두환과 그의 추종자의 ‘우리를 믿어달라’는 말에 한미 양국 국민은 모두 현혹됐다. 그런 교활한 행위는 거센 비판을 잠재웠다. 한국 국민은 ‘좋은 날들을 꿈꾸며’억압을, 그래도 조금은 나은 악마(전두환)도 받아들이려 했다”

위컴은 1982년 7월 대한민국 최고훈장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그는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써 그후 한국에서 일어난 반미 운동, 1987년의 6월 항쟁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국민의 정치문화를 클레인의 ‘인종의 문화’로 결론맺고 있다. 아마도 1979년~1982년의 격동기만을 적었기때문일 것이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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