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씨의 고조기(高兆基)는 역사를 연구하고 학문을 쌓아 시어사(侍禦使), 판병부사(判兵府事), 중서시랑(中書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탐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높은 관직에 오른 그는 어지러운 고려조를 안정시키기 위해 힘쓴 고려의 중신이었다. 관직에 몸담고 있는 동안 한번도 정치적 수난을 겪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의 성품이 얼마나 강직했던지 알 수 있다.

고말로의 손자인 그는 시문에도 능했다. ‘산장야양시(山莊夜兩詩)’및‘진도강정시(珍島江亭詩)’등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대표적인 그의 작품들이다. 사망한 뒤 문경을 시호로 받았으며 아라경(我羅境) 명당(지금 제주여고옆)에 묻혔다. 이곳은 1977년 7월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됐다.

고조기의 아들인 공익은 상당군파(淸州 고씨)의 파조가 됐으며 같은 항렬인 문익은 고려 선종조에 대장군 병부상서를 거쳐 서북면 병마사를 역임했다. 상서 문하시중에 올랐던 공익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청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충북과 강원도에 상당군파 후손들이 몰려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안경공 고령신은 고말로의 4대손이다. 고려 문종때 문과 급제하고 숙종때 동중시강학사가 됐다. 평생을 청백리로 지낸 그가 사망한 뒤 장례비가 없어 조정에서 호상하게 할 정도였다. 개성 고씨는 안경공의 후손들이다.

탐라사에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고적은 고말로의 현손이다. 그는 고려 원종2년(1261) 과거에 급제했으며 탐라국 성주의 자격으로 정언, 현석과 함께 외교사절로 몽고에 방문한 것은 원종7년 12월이었다. 원종11년에는 청주종사관으로 원종을 따라 몽고를 다녀왔는데 그 때 지은 ‘관풍토국음시(觀風土國吟時)’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듬해에는 신의군 삼별초의 항몽반란으로 탐라가 어지워지자 유총관이 되어 민심을 위무했다.

그는 충열왕4년(1278)에 조정에 들어갔다. 계속되는 병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여생을 보내기 위해 욕림지방으로 들어갔으나 충열왕이 1294년 고적의 청렴 정직함을 듣고 사신 류희안(柳希顔)을 시켜 그를 불러 감찰어사로 삼았다. 그해 11월 탐라가 고려에 환속되자 성주인 고적과 그의 아들 여림에게 상을 내렸으며 성주직을 세습하도록 조치했다.

문장에 뛰어났던 그를 기려 당시 유림들이 영천에 옥천서원을 세워 영모재로 부르고 고적과 아들 여림, 세재(世在:상서공) 등 3부자를 배향했다. 청주 백족산(지금 청원군 가덕면 거암리)에는 고적을 추모하는 ‘단향각(壇享閣)’이 세워졌다.

장흥백(長興伯:장흥 고씨의 파조) 고세재는 고려 인종13년(1135)에 문과에 급제하고 명종때에 이르러서는 이부상서를 거쳐 평장사에 올랐다. 특히 문필에 능했던 만큼 태자부학림시독학사, 문하성사, 금자광록대부평장사를 지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호남지방에 정착하니 그 후손들이 장흥백파, 화전군파로 분파되었다. 명현으로 꼽히는 임진왜란때의 충신 고경명(高敬命)이 그의 후손이며 현재는 고건 전국무총리(현 서울시장)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인단은 외세의 압력을 물리친 신념 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충열왕7년에 몽고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전함 900척을 비롯한 군수물자 지원을 고려에 요구해 왔다. 이때 왕은 이 막대한 무기의 공급을 탐라에 명령하였으나 성주 인단은 부담이 너무 과중함을 역설하여 선박 100척과 약간의 물자로 축소조정하는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고씨중앙종문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5가 1의 13호에 있으며 전화는 (02)755-091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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