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고향은 한강변이다. 경기 남양주시 능내리(옛이름 마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팔당호수의 물이 그의 생가 바로 앞에까지 들어차 있다. 그러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다산의 고향은 멀리 떨어져있다.

땅의 끄트머리에 가까운 전남 강진이다. 그는 신유사옥(1801년)의 여파로 머나먼 강진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가 살았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지식 발전소로서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을 살았다. 목숨만 부지한 채 이 곳에 쫓겨와서는 8년간을 동문 밖 주막에서 지냈다. 그의 곤궁한 모습을 보다 못한 해남 윤씨 일가가 산 기슭에 작은 집을 지어준 후에야 다산은 객방 신세를 면했다. 다산은 이 초당에 들어 “이제야 생각할 겨를을 얻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다산초당(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은 만덕산 기슭에 앉아 호수같은 강진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구에서 초당에 오르는 200여㎙의 길은 대나무, 향나무, 동백나무의 터널이다. 물들지 않는 상록수여서 숲에 들면 계절을 혼동하기 쉽다. 동백나무는 이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초당은 모두 3동의 건물과 1개의 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정약용의 거처였고, 양쪽의 동암과 서암은 그의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를 했던 곳이다.

본채에서 왼편 언덕으로 20㎙를 오르면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에서의 조망이 장관이다. 발아래 잔잔한 강진만에는 작은 섬 죽도가 드리워져 있고 멀리 부용산과 천태산의 돌봉우리가 구름에 가릴 듯 말 듯 눈에 들어온다.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간 형 약전과 고향 땅을 그리워했던 곳이다.

초당은 이 땅의 차문화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다산은 이웃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사상을 교유하면서 차에 심취했다. 중국에서 들여 온 차가 아닌 우리 차에 매력을 느꼈고 국산차를 예찬하는 ‘동다기(東茶記)’를 쓰기도 했다. “…나무도 하지 못할 깊은 병이 들어 애오라지 차 얻고자 할 뿐이요. …목 마르게 바라노니 부디 선물을 아끼지 말기를…” 차를 구걸하는 내용의 ‘걸명소(乞茗疏)’는 차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다산은 찻물을 얻기 위해 초당 오른편에 약천이라는 샘을 직접 팠고, 그 물을 끓이기 위해 솔방울을 지필 수 있는 넓적한 돌(다조)을 앞마당으로 옮겨놓았다. 약천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고, 다조에는 불을 놓았던 흔적이 역력하다.

다산은 1818년 57세의 나이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갔다. 그는 귀향해서 18년을 더 살다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의 18년간 그는 또 하나의 고향인 강진을 항상 그리워했다고 한다.


다산초당 가는 길

강진 버스터미널에서 해남 방면 18번 국도를 약2㎞ 달리다가 추도 3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시멘트로 포장한 완도 방면 군도 2호선을 타고 7㎞를 가면 초당입구에 닿는다.

버스는 강진 터미널에서 귤동행 시내버스가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7시20분까지 9차례 운행한다. 초당 인근에는 민박을 제외하고는 숙박시설이 없다. 만덕슈퍼(0638-432-5460), 만덕상회(432-0459), 다산슈퍼(432-0098)등에서 민박을 친다.

강진에는 다산초당 외에도 영랑 김윤식 생가, 청자도요지, 까막섬(천연기념물 172호)등 둘러볼 명소가 많다.

권오현 생활과학부기자


권오현 생활과학부 k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