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틀 홀더 서봉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 인심은 참으로 매정했다. 2년 연속 명인을 땄으면 ‘이젠 운이 아니고 실력이구나’라고 인정해 주어야 하거늘, 최소한 그런 사람이 몇 명이라도 있어야 하거늘 세상의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그 시각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서봉수가 명인 이외의 타이틀에 단 한번도 근접한 적이 없으니까. 꼭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리그전에 오르면 도전권이(꼭 따내지 않더라도) 유력하다든지 하는 뉴스는 종종 들려와야 하는 법인데, 그렇지 못했고 사실 서봉수가 그런 흉내조차 내지 못한 것도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솔직히 약관 서봉수가 리그전에 오르자 마자 타이틀을 딴 것만 빼고 나면 그는 각 기전 문턱에서 본선 무대를 밟기 전에 좌절하곤 했다. 아직 쟁쟁한 선배들과 ‘어울려 놀기엔’부족한 나이였다. 그렇지만 단 한번도 다른 기전에서 좋은 승부를 펼쳤다는 뉴스가 없으니 세인의 의아함은 극에 달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는 2연패를 달성한 서봉수에게 진심어린 충고의 말을 던진다. “세상만사가 쉽게 얻어지면 쉽게 잃는 법이다. 계속 정진하기 바란다. 앞으로 져야 할 무거운 짐이 많다…(중략)… 반드시 명인을 방어하라는 욕심섞인 충고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기 바란다.”

참 묘한 고언이었다. 명인을 잃어도 되는 나이(또는 위치)이니 방어하는데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그만큼 서봉수의 실체를 인정하기가 어려운 세상이었다.

그럭저럭 또 일년이 흘렀다. 이젠 조훈현이 찾아온다.

조훈현…. 일일이 그를 설명하는 일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계 바둑계의 기린아 조훈현. 조훈현이 1974년 서봉수와 처음으로 대좌한다. 서봉수가 명인을 따던 1972년, 공교롭게도 조훈현은 일본에서 귀국했다. 9살이던 1963년, 그러니까 서봉수는 바둑돌도 만져보지 않았던 코흘리개 시절, 조훈현은 입단했다. 그의 9살 입단 기록은 세계 최연소 기록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활약중인 조치훈이 12살에 입단하여 일본 최연소 기록이고 이창호는 11살이다.

조훈현이 귀국한 지 2년이 지나도록 둘은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1974년 5월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마주앉게 된다. 그간 기사실에서 비일비재했던 비공식인 연습 바둑에서는 가장 많이 만났던 22살 동갑내기 라이벌이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만나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과연 당당한 청년끼리의 용호상박에서 누가 감히 그 승자를 점칠 수 있을까. 바둑가는 다시 들끓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훈현 때문이었다.

조훈현은 이미 넉달전인 1974년 1월 최고위전을 획득한 엄연한 타이틀 홀더. 이번 명인전에서 ‘예상대로’서봉수를 꺾는다면 세대교체의 선두주자로서 일약 일인자의 대열까지 치솟을 찬스였다.

당시는 역시 유학파인 하찬석이 국수에 올라 신세대의 선봉장이 된 상태로 조훈현과 함께 쌍두마차 체제를 굳히는 듯한 느낌을 바둑가는 갖고 있었다. 조훈현은 당대 일인자인 김인과 최고위전에서 맞붙어 내리 세판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타이틀을 획득한 다음이었다. 사실 그 패배로 김인은 졸지에 무관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따라서 서봉수와 조훈현이 만나던 그날을 기준으로 하면 하찬석이 1위를 달리고 있던 상태였다. 1973년 연말에 윤기현으로부터 국수를, 이듬해 2월에는 김인에게 왕위를 빼앗았으니 유일한 2관왕이었다. 그리고 서봉수와 조훈현이 각각 하나의 왕관을 머리에 이고 그 뒤를 따랐다.

옥일승천의 기세로 한국 바둑의 대표주자로 치솟던 ‘황태자’ 조훈현, 약세로 명인 타이틀 하나만 가까스로 방어하던 ‘촌닭’ 서봉수. 사실 바둑가는 그들의 승부를 결과가 뻔한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뉴스와 화제>

· 루이나이웨이 이방인 국수에 오를까

과연 이방인 국수가 탄생할까.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이 ‘대표기사’조훈현 9단과 국수 타이틀을 놓고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두사람은 21일 한국기원에서 제43기 국수전 도전 3번기 제3국을 갖는다. 이미 이창호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격파하고 일약 도전권을 쟁취한 그녀가 마지막 주자 조훈현마저 제칠 수 있을 지 세계바둑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주의 하이라이트이자 올해 최고의 ‘빅카드’가 될 이 한판은 한국기원 홈페이지로 생중계된다. 인터넷주소는 //www.baduk.or.kr

· 최규병 기성도전 실패

‘386세대’의 반란은 끝내 물거품으로 끝났다. 최강 이창호에게 도전한 38세 도전자 최규병 9단이 1승 후 내리 2연패를 당해 생애 첫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14일 한국기원에서 벌어진 제11기 기성전 도전 3번기 최종국에서 도전자 최규병은 시종 무기력한 경기끝에 이창호에게 135수만에 완패했다. 이로써 이창호는 기성전 8연패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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