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단기 4333년)은 경진년(慶辰年), ‘용(龍)의 해다. 용은 십이지(支)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상상의 동물로 봉황, 기린, 거북과 함께 상서로운 사령(四靈)으로 꼽는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은 용의 모양을 ‘머리는 낙타같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와 같으며 목은 뱀과 같고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와 같으며 발바닥은 범과 같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용은 날짐승 들짐승 물짐승의 복합적인 형태와 능력을 갖추고 있어 뭇 동물의 으뜸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용의 순수한 우리말은 ‘미르’. ‘미르’는 물의 옛말 ‘미’, ‘매’ 또는 ‘므르’와 상통하고 ‘미리(豫)’의 옛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땅이름에는 ‘미리내→용천(龍川)’, ‘미르기물→용소(龍沼)’, ‘미르기메→용산(龍山), ‘미르기 바위→용암(龍岩)’, ‘미르기 못→용연(龍淵), ‘미르기 굴→용굴(龍屈 혹은 血)’로 표기되고 있다.

문헌 설화 민속 등에서 용의 등장은 반드시 어떠한 미래(미리:豫)를 예고한다. 용이 나타난 뒤에 성인이 탄생하거나 군주가 죽고, 농사가 풍작이거나 흉작에 빠지는 등 국가적 대사건의 기록이 뒤따르게 된다.

용은 또 우리의 생활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수많은 민간신앙 민속 설화 미술작품 등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민간신앙에서 용은 물을 지배한다는 수신(水神)이자 용왕으로 믿어져 왔다. 신라시대부터 가믐이 들었을 때 용의 화상을 그려놓고 비를 빌었다는 기록이 전해오며 바닷가 어촌에서는 안전한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리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새해가 되면 궁궐은 물론 민가의 문에 용 부적을 붙이는 풍속이 있었다. 용의 신령스러운 힘을 빌어 악귀를 쫓으려는 마음에서였다. 우리 역사의 많은 설화에서 용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용과 관련한 설화가 무려 86편이나 실려있다.

설화에서 용은 주로 시조의 어버이 또는 나라를 지키는 신 등으로 나타난다. 백제의 무왕은 지룡(池龍)의 아들이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비가 된 알영은 용의 왼쪽 갈비에서 나온 것으로 역사책은 적고 있다. 고구려, 백제를 평정한 신라 문무왕은 승하하여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동해를 지키는 국신 해룡이 되었다고 전한다.

서울속의 땅이름에도 와룡동을 비롯해 용산, 용두동, 용문동, 용두레 등 ‘용’자 이름이 많다. 그 가운데 창덕궁의 돈화문앞 ‘와룡동(臥龍洞)’은 ‘용이 누워있다’는 뜻이 아닌가. 용이라면 승천(昇天)을 해야지, 누워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리 상서러운 것이 못된다.

용은 곧 나랏님, 국왕의 상징이다. 그래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창덕궁에서 치국하던 왕들 가운데는 많은 비운의 임금이 이 와룡동을 밟으며 피눈물을 뿌렸다. 단종이 그러하고, 연산군, 광해군이 돈화문앞 와룡동을 지나며 용의 눈물을 흘렸다. 어찌 ‘용이 누워있는’ 와룡(臥龍) 이라는 땅이름을 탓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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