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가는 시민단체, 기업은 대책마련에 비상

대학가에서 학생운동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1980년대, 1년 12개월중 5월은 ‘특별한 달’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탓인지 해마다 5월이면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으로 시작되는 운동권 가요가 캠퍼스에 울려 퍼지면서 학생 운동이 연중 최고조에 달했고, 덩달아 학교 당국과 공안 당국은 긴장을 해야 했다.

그런데 10여년이 흐른 지금, 비슷한 상황이 재계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1998년 IMF체제가 들어선뒤 경영의 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12월 결산법인의 주총이 몰려있는 3월이 다가올 때마다 소액주주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가 “3월, 그 날이 다시 왔다”며 일전을 준비하는 반면 거꾸로 대기업들은 대책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강도 더해가는 소액주주운동

그렇다면 지난해와 비교할 때 새 천년 소액주주 운동의 열기는 어느 정도일까. 또 올해의 주요 이슈는 무엇일까. 현대, 삼성, LG, SK그룹 등 소액주주 운동의 주요 타깃인 대기업 관계자들은 “올해는 소액주주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1998년 주총부터 시작된 소액주주 운동이 제 궤도에 오른데다가 1999년 주요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이익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3월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참여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가 대기업 주총에서 요구하기로 정한 사항은 경영권의 본질적인 부분과 맞닿은 ‘기업지배구조 개선문제’이다. 요컨대 1998~1999년에는 특정 기업의 부당거래와 부실경영에 대한 이의제기 차원에 머물렀지만 이번에는 대기업 임원을 그룹 총수가 아니라 소액주주들이 직접 임명하도록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 투명성을 제고한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김은형 간사는 “LG그룹으로 편입된 데이콤과 관련,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2명 이상의 소액주주 추천인사를 포함한 사외이사로 이사회의 절반 이상을 구성하고 사외이사 2인과 상임이사 1명으로 감사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LG그룹에 요청한 상태”라고 밝혔다. 김간사는 “아직까지 LG그룹측으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며 “그룹측의 대응방향에 따라 참여연대의 주총참여 강도가 좌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실련도 SK텔레콤의 신세기통신 인수와 관련 독과점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한편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정책 당국을 대상으로 ‘사외이사제도’의 활성화를 적극 요구할 계획이다.


예봉 피할 사전조치로 분주

2000년 3월 주총에서는 또 소액주주 운동의 세력 역시 더욱 다양하고 강력해질 전망이다. 특히 참여연대는 국내 증시에 30억달러를 투자한 미국의 템플턴 그룹과 4대재벌 주주총회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했는데 이는 그동안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논리로만 압박하던 소액주주 운동이 ‘제3세력’을 등에 업고 표대결도 불사할 수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시민단체 외에도 주총을 앞둔 기업들은 새로운 소액주주 운동세력으로 떠오른 사이버주주 동호회의 공세에도 시달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텔슨정보통신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이 만든 텔슨정보통신 주식동호회를 포함, 새롬기술과 가산전자 소수주주 동호회는 이들 기업에게 투명한 경영과 홍보활동 강화를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주주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그렇다면 소액주주 운동이 타깃이 된 대기업들은 어떤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상상할 수 있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마련한 상태다. 즉 시민단체와의 물밑접촉, 주총 예행연습, 주가관리, 동반주총 등의 각종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시민단체와의 사전교감. 삼성전자, SK텔레콤 등 최근 시민단체의 공세에 시달린 일부 대기업들은 이들과 미리 접촉, 그들이 요구하는 개별 현안을 수용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SK텔레콤의 경우 소액주주들이 줄기차게 요구한 주식의 액면분할을 수용할 태세이며 삼성전자도 사외이사 확대여부를 싸고 참여연대와 의견조율에 나선 상태다.


주주달래기 주가관리에 부산

주가하락으로 심기가 상한 주주들을 달래기 위한 주요 기업의 적극적인 주가관리도 또다른 주총 대책이다.

특히 올들어 주요 계열사 주가가 20~40% 가량 하락한 현대그룹은 3월 주총을 앞두고 ‘주가 띄우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2일에 현대중공업이 주가 안정을 위해 2,000억원의 자사주 펀드를 조성했다고 발표한 것을 비롯해 현대엘리베이터(90억원), 현대상선(1,500억원), 현대미포조선(150억원) 등이 각각 주가관리를 위한 자사주 펀드 조성을 공시한 상태이다. 현대자동차 역시 최근 8명으로 투자자관리(IR)팀을 구성하고 지난 8일 2주일정으로 투자자 설명회에 돌입했다.

현대자동차는 또 이계안 사장을 위원장으로 각 부서 실장급 임원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IR위원회를 설치, 이를 통해 회사내 각종 정보를 취합해 주식시장과 주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릴 방침이다. 이밖에도 재벌그룹 주요 상장 계열사들도 기관과 외국인 등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장 초보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주요 그룹들이 똑같은 날 주총을 한꺼번에 치르는 ‘동반주총’도 시민단체의 예봉을 꺾는 방법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3월16일로 잠정 결정된 삼성전자의 주총일에 맞춰 현대, LG, SK그룹 등 주요 그룹 계열사의 주총이 한꺼번에 열릴 전망”이라고 말했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