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이름을 조사해 보면, 나라안 곳곳에 ‘용(龍)’걸림의 땅이름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느 고을 치고 용소(龍沼), 용추(龍楸), 용암(龍岩), 용담(龍潭), 용연(龍淵) 등 용 없는 곳이 있는가.

그런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렇게 번성했던 용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천대(?)를 받았다. ‘비현실성’의 낙인 때문이다. 이웃 중국에서는 여전히 용 문화가 기성을 부리는 동안, 우리는 조용히 용과 팬터지의 보고를 죽여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12간지의 순환은 어김없이 돌게 마련…, 새 천년의 시작은 용이다. 닭, 뱀, 소, 개, 원숭이와 용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현실’과‘팬터지’의 차이가 아닐까. ‘훈몽자회’에서 용을 ‘미르룡’이라 했다.

용은 순수한 우리말로 ‘예측’을 뜻하는 ‘미리’또는, 물을 뜻하는 ‘미르’로, 미륵불의 도래(예측)사상과 걸림이 되는 용화상, 용화수, 용화향도 등의 명칭에 모두 용이 붙어 있는가 하면, ‘개천에 용났다’는 말도 있다.

늙은 어부가 용왕의 아들인 잉어를 구해주고 보은을 받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림을 기억하리라. 용궁은 환상의 나라다. 심청이가 연꽃으로 환생한 곳도 용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토끼의 간을 놓고 ‘어물전’대신들이 말싸움을 벌인 곳도 바로 용궁이다. 험한 파도와 싸우며 물질을 하는 탐라의 해녀들은 제주 남쪽 바다 어딘가에 이어도를 설정해 놓고 그 곳을 향해 용왕맞이 굿을 행한다.

용은 분명히 물과 걸림이 있다. 비늘이 있는 인충(鱗忠)의 으뜸이며, 물짐승(水)이다. 강과 바다에서는 용왕제를 올려 무사안일을 빌었다. 마을에선 동네 우물에서 샘굿 혹은 용왕제를 지내면서 ‘샘 구명을 뚫으세’를 외쳤다. 기우제를 올리는 명소도 용담, 용소, 용연이었다.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의 명을 받아 한양의 다섯군데에 ‘오방토룡단(五方土龍壇)’을 만들고,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나온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든 것이 흥인지문(興仁之門)밖 3리의 들말(平村)인 지금의 용두동 지역에 농사신을 모신 선농단(先農壇)과 함께 ‘동방청룡단(東方靑龍壇)’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 뒤, 이 동방청룡단의 모양과 형태를 그대로 따 서방, 남방, 북방, 중앙의 오방토룡단(五方土龍壇)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 오방토룡단은 농본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는 곳이다.

가믐이 들면 나라안에서 기우제를 올리도록 하였지만, 동방청룡단의 기우제는 용의 모습을 그려놓고 지냈으며, 친히 나라의 임금께서 폐백을 하사, 예조나 관상감에서 이를 받들어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동방청룡단과 우사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제사의 형태도 사라져 버렸다. 보다 못해 동네의 뜻있는 민간인들이 대신 제사를 올리면서 기우는 물론, 시화연풍과 국태민안의 제사로 발전하였으나 이 마저도 일제의 태평양전쟁 도발로 제기를 모두 공출 당하는 등 일제의 관행으로 유구한 전통의식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1991년부터 용두동에 전해오는 이같은 이야기를 토대로 ‘용두(龍頭)’라는 땅이름을 따 매년 ‘용두제(龍頭祭)’를 올리고 있으니 새천년, 새 세기, ‘용(龍)’의 해에 용이 승천하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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