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대통령은 3·1절 92주년인 2000년 3월1일 민국당 최고위원 장기표씨와 오찬을 함께 했다. 장씨는 재야에서 진보적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이며 ‘3김 정치’의 틀 속에는 있지 않았다. 이 오찬의 뜻은 무엇일까.

한국일보 2월26일자 사설 ‘지역주의와 3김 정치’의 결론 부문에 대해 YS는 장 최고위원에게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이 사설은 주장했다.

“지역정서와 숙명적 인연을 맺고 있는 3김, 특히 물러난 YS는 지금부터라도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을 역임한 국가 지도자가 한 지역의 ‘대표자’로 오해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YS는 지난 2월25일 기습적으로 상도동을 찾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40여분간 만나 조찬을 했었다. 그리고 그의 언행은 시작됐다. 경기도 양자산 정상에 오른 YS는 “영하 6도에 바람까지 부는데도 추운 줄 모르겠다. “이 총재가 ‘도와달라’했으나 나는 아무 얘기도 안하고 듣기만 했다”고 말했다.

조순 민국당 대표와 가진 만찬에서도 YS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일에는 계속 의견을 말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전직 대통령이 중요한 일이 있으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전통처럼 돼 있다” YS를 청와대에서 비서실장으로 모셨던 김광일 전실장은 2월27일 민국당에 입당하며 이회창 총재의 공천에 대한 YS의 코멘트를 전했다. “늑대 피하려고 했더니 호랑이를 만났다”고 했다는 것이다.

YS의 속마음을 아는듯 김대중 대통령은 조선일보와의 2월27일 인터뷰에서 YS와의 ‘소원한 관계’에 대해 단호한 언조로 말했다.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물론 노태우 전 대통령과도 화해했는데 내가 왜 김 전 대통령과 화해하지 못하겠읍니까. 국민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대 합니다”

DJ는 그러나 무엇 때문에 소원이 시작되었고 ‘국민 보기에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DJ와 YS간의 ‘경쟁자와 협력자’, ‘적과 동지’, ‘적대자’, 그리고 요즈음의 ‘소원한 관계’까지 이른 역사는 한국 정치사의 핵심이 된다.

고려대의 함성득 교수가 편 ‘한국의 대통령과 권력’에서 김창기 조선일보 정치부장은 이런 주장을 펴고 있다. YS를 1984년 민추협 시절부터 청와대까지 10여년간 취재했던 김 부장은 YS와 DJ관계를 “경쟁과 협력 관계가 아니라 경쟁관계, 적대관계였다”고 결론내렸다. “YS는 DJ를 대단히 경계했고 불신했고 멸시했다. 과연 YS가 진정으로 DJ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가질수 있었을까.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고 밝혔다.

YS 자신도 지난 1월10일 나온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의 여러 곳에서 DJ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질수 없게 했던 DJ의 야심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1980년엔 민주화의 전열을 약화시켰고 국민에게도, 자신에게도 불행을 초래했다.

그로 인해 야당의 힘이 분산되었고 결과적으로 전두환의 쿠테타를 막지 못했다. 1987년에는 지역감정을 선거의 기본전략으로 삼겠다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발상을 했고 신당창당으로 뒤통수를 쳤다. 자신의 역사적 소명에 대한 판단 착오를 일으켰다”고 썼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중 DJ나 YS처럼 투우같은 정치마당에서 대통령을 지낸 이는 리차드 닉슨이다. 그는 DJ나 YS처럼 ‘정치 9단’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생물’인 정치인이기 때문에 ‘할 말을 해야한다’는 전직 대통령은 아니었다.

19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닉슨의 여비서 노릇을 한 모니카 크로우리는 닉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써 역사 뒤에 자기자신을 매김하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나를 ‘Off the Record’라는 책에서 쓰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스스로 사임한 대통령인 그는 “정치인은 냉혹한 사람이다. 승자에게는 응원하지만 패자는 짓밟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는 지도자는 “지성이란 ‘머리’, 열정이란 ‘가슴’, 용기라는 ‘배’를 가진 사람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를 대통령일때는 강한 권력의지로 공중의 비난에 인내하며 조직적인 반대세력에 맞서 싸워야하며 역사에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은 자기가 재임중 이룬 역사적인 업적(중국과의 국교수립, 동서화해)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크로우리는 결론짓고 있다. “닉슨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위대한 지도자는 탐닉하지 않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역사에 자기 업적을 매김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적어도 다음, 다음 세대에는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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