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며 나를 찾은 '순수의 여행'

멀쩡히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집도 팔았다. 직장생활 3년에 모은 돈까지 다 쏟아붓는 터라 뒷일도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때 일은 그때 닥치면 생각해보자고 했다. D-Day 1998년 7월. 그 이듬해 연말께에야 끝난 독일 남자 베른하임 에릭(38)과 한국 여자 김문숙(31)씨 부부의 인생 대회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여행을 다녀온 뒤 많은게 달라졌어요. 주위의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 또 우리 부모님, 내가 태어난 나라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피부로 깨닫게 됐죠. 사실 처음 이 여행을 결심하게 된 건 뭣보다 제 자신과의 싸움, 즉 ‘그래, 어디 너 한번 네 자신과 싸워봐라’하는 거였는데, 싸운 결과요? 결국 제가 이긴 거지요.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지고 남편에 대한 존경심도 더 커졌어요. 아주 많은 공부를 했어요”


운명처럼 다가온 빨간 자전거

두 사람의 거주지인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발, 1년2개월에 걸쳐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를 경유해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총 14개국 2만여km를 이동하는 자전거 대장정이었다. 그 힘겨운 여행에서 돌아온지도 이제 넉달째.

그러나 아직도 이들에겐 지난 1년여간 겪었던 경험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 하루하루의 삽화를 그림그리듯 생생하게 기억하는 김씨. 그 곁에 앉은 남편 에릭씨 역시 같은 감격과 소감을 갖고 있었다.

“제가 느낀 것도 인간은 누구나 똑같더라는 겁니다. 어느 땅 어디에 가든 부유한 사람은 부유한 나름대로의 기쁨과 고민이 있고 가난한 이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기쁨과 근심을 똑같이 갖고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경우엔 우리가 불쌍하다고 여긴 사람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수도 있습니다. 제 자신, 독일인으로 태어나면서 갖게 된 부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가난한 이웃과 나눠야 할 것이 많습니다”

대체 어떤 일이 그들의 여행에서 일어난 것일까. 여행의 발단은 1993년 김씨의 생일 때 에릭씨가 선물한 빨간 자전거에서부터 시작됐다. 결혼전 부모의 반대에 부딪친 김씨에게 청년 에릭은 ‘이 자전거로 당신의 고향 강릉까지 달려가면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부모님의 반대가 누그러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당시엔 김씨가 웃음으로 흘려들었던 그 얘기를 에릭씨는 결혼후에도 끈질기게 상기시켜왔던 것. 1997년 김씨가 결심을 굳히면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가게 됐다. 이미 일종의 예행연습도 거친 뒤였다. 건축학 석사, 감리사 자격도 갖춘 건축 프로젝트 매니저인 에릭씨는 1995년 유럽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초대받아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다뉴브강을 따라 김씨와 보름간의 자전거여행을 시도했던 것이다

. 생전 처음 겪는 노숙경험에 투덜댄 일도 잠시. 서서히 자신감이 붙은 김씨는 약 3년간 주함부르크 한국 총영사관에서 통·번역일을 하며 모은 돈을 함께 경비로 보태며 여행에 나섰다. 1998년 7월경 부부 모두 직장을 그만둔 뒤 일생일대의 자기도전에 나선 것이다.

“처음엔 불안했어요. 이렇게 직장이며 집이며 다 버리고나면 막상 여행이 끝난 뒤엔 어떻게 살아가나, 암담하더라구요. 그때 남편이 그러는거예요. ‘당신을 절대 굶기지 않는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건데 넓은 집, 좋은 차를 사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냐. 우린 젊으니까 뭐든 할 수 있다. 지금 세계를 보러 가자’구요 그 얘기를 들으니 불쑥 용기가 생기더군요”


목표·제약없이 시작, 여행의 기준은 ‘자유’

여행은 아무런 목표나 제약없이 진행하기로 했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달리고 어디서 며칠동안을 묵든 모든 것의 기준은 자유였다. 기분 내키면 두달이고 석달이고 시골 장터까지 돌아다니며 머물기도 하고 도무지 궁합이 맞지 않는다 싶을땐 불과 1-2주도 못되어 미련없이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정작 가장 치열한 싸움은 밖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었다. 말 그대로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사뭇 대조적인 두 사람의 체구는 물론 성격까지도 극과 극을 이루는 부부. 우선 외형상으로 키 196cm의 장신인 에릭씨 옆에 154cm의 자그마한 김씨가 서면 이들은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못지않게 두드러진 것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성격이다.

김씨는 다소 급한 성격에다 순간적으로 차고 덥기가 유난한 ‘즉흥파’에다 직선적인 반면 오히려 동양적인 온유함에 가까운 것이 남편 에릭씨다. 특히 김씨의 성격을 진작에 간파한 에릭씨는 일찌감치 몇 가지의 여행철칙을 단단히 못박아두었다. ‘아무리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상대방에게 통보한 뒤 최소한 7일간의 유예기간을 둔다’는 것. 말할 것도 없이 김씨의 조급증을 우려한 에릭씨의 지혜였다.

실제로 그 원칙은 참으로 유용했다. 우려한 바와 같이 김씨는 이미 여행 시작 사흘째부터 포기선언을 수없이 남발하기 시작한 것. 시간이 지나면서 다리에 멍이 들고 잠자리가 불편해지자 자신은 시댁으로 돌아갈테니 남편 혼자 넓은 세상을 잘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숱한 통보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집으로 돌아간 적은 없다. 늘 7일동안의 유예기간이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고 만 것이다. 어느덧 불편과 사고에도 익숙해지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금씩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갖는 법보다 버리는 법을 더 많이 배웠다. 출발 당시의 장비를 보면 각자의 체형에 맞춰 특수제작한 자전거 두 대에다 가방 10여개. 행여 쓰일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말끔한 양복에다 갖가지 의상, 화장품 세트 등 온갖 구색을 다 갖추는 바람에 한번 자전거가 쓰러지면 혼자 일으키지도 못할 정도였다. 결국 필요 이상의 짐에 짓눌린 김씨는 사나흘만에 10kg의 짐을 독일로 되돌려 보내고서야 비로소 여행자가 되었다.


남편 잃어버리고 식중독에 걸려 사경 헤매기도

1년 이상의 객지생활을 고려해 이동선은 따뜻한 지역으로만 골랐다. 여행 스케줄이며 동선을 정하는 것은 모두 에릭씨가 맡고 김씨는 그 뒤를 따르기로 했는데 가는 곳마다 주로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주로 김씨쪽이었다. 그중 하나가 이태리에서 겪은 고속도로 위의 실종소동.

도로표지판이 제멋대로인 이태리를 여행하던 중 그만 국도에서 앞서가던 남편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후 직감대로 표지판을 따라간다는 것이 남편과 약속한 길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의 고속도로로 올라선 것이었다.

좁은 도로 위로 미친 듯 질주하는 자동차의 틈에서 겁에 질려 있던 그녀는 아무래도 남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자 결국 어느 지점에선가 반실성한 사람처럼 떨며 우왕좌왕하다가 지나가던 현지인에게 발견돼 도움을 받았다. 길이 엇갈린 남편과 뒤늦게 만나 눈물의 재상봉으로 막을 내렸던, 참으로 아찔한 사고였다.

객지에서 유언을 남길 뻔한 일도 있다. 기온 섭씨 45도가 넘는 나라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도착했을 땐 오랜만에 태국음식을 먹고난 뒤 땀띠처럼 피부에 두드러기가 솟았다. 유독 김씨에게만 나타난 증상이었다. 한밤중이 되자 증상은 이미 온 몸으로 번졌고, 머리밑도 미칠 듯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기미에 급히 병원 응급실을 찾았지만 의사마저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며 답답한 대답만 되풀이했다.

‘이대로 죽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김씨. 남편에게 부탁해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음성이나 듣고 죽겠다’며 한국에 전화를 걸어달라고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살아난 것은 마지막 처방이라며 의사가 놓아준 코티즌 주사가 의외로 효과를 보인 것. 순식간에 증세가 사라졌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도 김씨는 또한번 집에 돌아가겠노라고 말을 꺼냈지만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누구의 강권때문도 아니었다. 스스로 발을 빼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여행이었다.

당초 ‘노숙은 절대불가’라며 질색을 하던 김씨지만 이태리의 어딘가에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침낭 하나로 잠을 청한 적도 있고 그런저런 스트레스와 불만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다 애꿎은 남편과 충돌, 며칠동안 냉전속에서 자전거여행을 계속하기도 했다. 여자라서 겪는 또다른 스트레스도 있었다. 인도에선 자신들을 희귀동물 보듯 몰려든 인도인중 한 남자에게 엉덩이를 꼬집히기도 했다. 물론 한번 화가 나면 성질이 불같은 이 한국 여인네를 몰라본 그 치한은 즉석에서 그녀에게 된통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자전거를 실어주겠다며 호의를 가장해 슬쩍 성희롱을 시도한 트럭운전사들때문에 또한번 성질이 폭발. 여차하면 자동차 대추격전이라도 벌일뻔한 그녀를 주위에서 간신히 진정시켜 가까스로 사건을 종료.

“사람이 억세면 돌멩이까지 다 억세다는 거 아세요? 인도네시아가 정말 그렇거든요. 남자만 포악한게 아니라 여자도 억세고 심지어 동네 개까지 그렇게 사납고 성질이 나빠요. 하다못해 길가의 돌멩이까지 전부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뿐이더라구요. 참 신기한 일이죠?”


“우리나라 만큼 아름답고 풍족한 땅 없어”

아쉬운 것은 당초 계획했던 일정중 4개국을 본의 아니게 포기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인접국인 에리트리아와 막 전쟁을 시작한 에디오피아, 정치적인 이유로 관광객을 통제하던 미얀마, 이 때문에 방글라데시로 가는 길까지 더불어 막혔다

. 그리고 체류기간 고작 14일밖에 허용치 않는데다 각종 초청장이며 재정보증 등 우리나라만큼이나 ‘문서를 좋아하는’ 대만도 어쩔수 없이 포기. 필리핀쯤에 이르렀을 땐 한국의 가을이 자꾸만 그리워졌다.

“새삼 깨달은 건 우리나라만큼 아름답고 풍족한 나라가 없다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저희가 여행중에 태극기를 선물로 나눠주며 우리나라를 알렸다고 대단한 애국자처럼 추켜세우시지만 사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절로 애국자가 될 수 밖에 없더라구요. 더구나 최근에 여기 들어와서 돌아보니 우리나라에도 자전거도로가 꽤 많이 생겨있던데, 특히 세계여행을 나가는 젊은이라면 직접 자전거로 달리며 우리 땅의 자연과 공기를 맘껏 느껴보고 나가라고 권해주고 싶어요”

이들 부부의 결혼 역시 또다른 가시밭길의 전형이다. 한양대 독문학과를 졸업, 전문직 공부의 꿈을 안고 1991년 독일로 건너간 김씨는 1992년 카셀대학에서 당시 건축학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에릭씨를 만났다.

당시 김씨에겐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국내에 있었고 에릭씨는 자선과 봉사의 삶을 위해 곧 볼리비아로 떠날 계획을 갖고 있던 상태. 갖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결혼이 이루어졌지만, 교육계에 계시던 아버지를 비롯, 김씨 가족의 극심한 반대로 두 사람은 몇 해를 두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외롭게 치른 독일에서의 결혼식, 마지못해 딸의 고집에 지는듯 하면서도 억지로 바다에 끌고가 수영을 시키거나 한국의 시골 재래식 화장실에서부터 일류 호텔에까지 반강제로 끌고 다니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외국인 사위를 시험해보던 완고한 장인 등 결혼 주변의 사연만도 무궁무진하다.


“중남미 대륙여행이 남아있어요”

얼마전 서울 충무로에서 사진전시회를 가진데 이어 현재 강릉 문화예술회관에서 같은 행사를 열고 있는 이들은 그동안에 찍은 슬라이드와 사진중 150점, 그리고 사막의 흙먼지에서부터 뜨거운 열대의 바람, 자신의 눈물과 땀이 배인 텐트며 자전거 등 여행장비들을 선보이고 있다.

얼마전 전시회에선 ‘나는 여행때 이런 이태리제 신발과 외제옷을 입어야만 내 격에 맞는다’며 전시회보다 돈자랑을 하러온 어느 의사에게 ‘한국인이 한국 신발과 한국 옷이 안맞으면서 왜 한국에서 의사노릇을 하시느냐’며 쏘아붙이기도 했던 김씨. 어쨌거나 강릉 친정에 머무는 것도 앞으로 길어야 이달말까지다.

3월11일 전시회가 끝나면 늦어도 4월전엔 독일로 돌아가 할 일이 많다. 남편의 고향 바톰브시에서의 전시회 일정은 물론, 당장 일자리와 집을 찾는 일도 발등의 불이다.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 그것은 명백하다. 이번 여행의 후속편으로 이어질 중미, 남미의 대륙탐험 등 앞으로의 더많은 계획을 맞추자면 여행자금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오늘을 뛰는 수밖에 없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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