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특수 노리고 활개, 유권자·후보 모두 골머리

서울 서초구에 사는 L(주부·37)씨는 요즘 전화받기가 짜증스럽다. 중년여인의 그리 맑지 못한 목소리나,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잇따라 전화를 걸어와 질문을 해대는 탓이다.

“재건축 시공사로 H건설사와 S건설사 중 어느쪽을 선호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식의 질문은 그래도 양반이다. “모 건설사가 제공하려는 이주비용이 다른 건설사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라는 등의 질문도 심심지 않다. 어느 일방을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질문지로 둔갑한 예다.

L씨가 전화 설문조사 등쌀에 시달리게 된 것은 재건축 대상인 강남구 주공아파트 X단지에 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아파트 소유자의 무기명 투표를 통해 재건축 시공사를 선정하는 관계로 L씨가 여론조사기관의 집요한 전화설문 공세에 시달리게 된 것. 여론조사 의뢰자는 물론 재건축 시공사로 경합중인 S사와 H사. 앞다퉈 여론조사기관을 이용해 투표향방을 예측하거나 자사를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파파라치로 둔갑한 여론조사기관

L씨는 전화 설문조사자에게 한바탕 화를 내야 할 경우도 있다. 조사자가 무례한 말씨를 쓰거나 때로는 재건축 관련 사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앞뒤가 안맞는 질문을 해대기 때문이다. 조사기관이 일당을 주고 고용한 주부나 학생 조사자에게 적절한 사전교육을 실시하지 않은 탓이다.

L씨는 “아파트 한 채 가진 죄로 요즘 ‘파파라치’에게 시달리고 있다”고 푸념한다. 파파라치는 유명인사들의 사생활을 전문적으로 캐고 다니는 프리랜서 사진기자. L씨의 말을 따르면 여론조사기관이 파파라치로 둔갑한 셈이다.

여론조사는 마케팅의 필수적인 한 과정으로 자리잡았다. 선거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4·13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기관은 특수기를 맞았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자격미달 여론조사의 행태로 인해 유권자들이 겪는 피해는 L씨의 경험과 별로 다르지 않다. 경실련의 고개현 시민입법국장의 말. “총선특수를 노리고 급조된 여론조사기관이 굉장히 많다. 상당수가 정치광고회사 간판을 내걸고 있어 현황파악 자체가 힘든다.” 사이비가 많다는 얘기다.

여론조사기관의 횡포는 유권자와 후보자 모두를 골탕먹인다. 강남구에 사는 주부 K씨는 최근 여론조사기관의 설문조사자라는 한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4월 총선에서 A씨와 B씨, 지역발전에 힘써온 C씨가 출마하는데 누구를 뽑겠습니까?” 자동응답전화(ARS)로도 비슷한 질문을 해오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는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데 참신한 A씨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십니까? 가능성이 높다면 1번을 눌러주세요.”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편드는 것도 문제지만 K씨는 가르쳐 주지도 않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여론조사기관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했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도 전화공세를 비켜가지는 못한다. 아이가 전화를 받으면 ‘아빠를 바꿔달라’고 한 뒤 비슷한 질문을 해댄다.


여론조사 빙자, 상대방 공격

여론조사기관들은 조사의 수요자인 출마예상자들에게도 끈덕지게 판촉을 해댄다. 서대문 지역 출마예상자인 J씨는 최근 여론조사를 대행해 주겠다는 제의를 3차례나 받았다.

이미 특정 여론조사기관과 계약했기 때문에 딱 잘라 거절했다고 한다. 한차례에 최소 수백만원을 요구하며 달라붙는 여론조사기관의 등쌀로 고통을 호소하는 후보도 있다. “다른 후보도 다 하고 있는데 혼자 안하면 손해다”“지지율을 올리는 방법도 많다”는 식으로 제의해 온다는 것.

여론조사를 빙자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특정 후보측의 여론조사기관임을 자칭해 피조사자(유권자)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피조사자가 응답을 사절해도 계속 질문을 해대다, 나중에는 아예 욕설을 하는 것. 특정 후보에 대한 피조사자의 인식이 나빠지게 될 것은 당연하다.

이같은 경우에는 여론조사기관이 실재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흑색비방을 위해 여론조사기관을 사칭했는지 여부도 불명확하다.

여론조사를 위해 유권자 개인정보를 빼내 무단활용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불법적으로 선거인 명부를 뒷거래하는게 대표적. 지난해 11월에는 경기도 광명시에서 35만명분의 선거인 명부가 보험대리점에 유출된 사실이 검찰에 적발된 바 있다.

상당수 여론조사기관이 전국의 선거인 명부를 만들어 파는 조직과 커넥션을 맺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주민등록번호를 분석해 출생지를 파악한 다음 지역색에 호소하는 여론조사를 행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한 여론조사 관계자는 “조사비용에 웃돈을 얹어주면 유권자의 출생지 등을 파악해 지지성향을 분석해 주는 것은 관행화됐다”고 말했다.

사이비 여론조사기관의 불법행태는 유권자와 후보자를 괴롭히는데 머물지 않고 개인정보 유출과 지역감정에 불을 지피는 선까지 이르렀다. 민주주의 정치과정의 필수물로 자리잡은 여론조사가 만만찮은 부작용을 수반하고 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