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판 단골메뉴, 역대선거에서 어김없이 등장

선거때만 되면 어김없이 지역감정이 판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유권자의 수준이나 농촌지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획정된 선거구 때문에 지역감정전략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지적한다. 정치평론가 유시민씨는 “지역감정 선동은 핵무기에 비유할 수 있다. 가장 비용이 적게 들어가면서도 확실하게 표를 긁어 모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라고 말했다.

이는 역대 선거를 살펴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3김’에 의해 치러진 한국의 대통령선거는 지역구도를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멀리 거슬러갈 필요도 없이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가 맞붙었던 1992년의 14대 대선은 지역감정이 표에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초원복국집 사건, 영남표 결집 일등공신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둔 1992년 12월11일 오전 6시 부산 초원즉석복국집에서는 김기춘 전법무장관과 김영환 부산시장, 정경식 부산지검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부산지구 기무부대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우명수 부산시교육청 교육감,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강병중 부산상공회소 부회장 등 부산지역 기관장 9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김영삼 후보의 당선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며칠뒤 정주영 후보측에서 이들의 발언내용을 생생하게 공개하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김 전장관은 대통령선거법위반 혐의로 기소됐고 김 시장과 박 부산경찰청장은 직위해제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영남표를 단결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분석이다.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렸던 영남 유권자도 투표날이 다가오면서 호남 출신 대통령이 탄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 결과는 김영삼 후보의 경우 경북과 경남에서 각각 62.5%, 72.8%를 차지한 반면 전북과 전남에서 5.7%, 5.3%에 그쳤고 김대중 후보는 경북과 경남에서 8.9%, 10.9%에 그친 반면 전북과 전남에서는 89.1%, 93.4%로 지역의 표를 휩쓸었다.

이후 김 전장관은 대통령선거법이 위헌으로 판정나 공소취소된 뒤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에 임명됐고 박 부산경찰청장도 주위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서울경찰청장을 거쳐 경찰청장에 발탁됐다. 정경식 부산지검장은 대구고검장으로 승진한 뒤 김영삼 대통령의 지명으로 헌법재판관에 임명됐으며 김 시장도 직위해제됐다가 부산교통공단 이사장으로 복귀하는 등 대부분 김대통령의 임기중 요직에 임용됐다.


위력 발휘한 충청도 핫바지론

지역감정이 위력을 발휘했던 또하나의 예는 1995년 6·27 지방선거.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민자당 대표에서 쫓겨나 자민련을 만든 김종필 총재는 6월13일 충남 천안역 광장에서 벌어진 유세중 연단에 올라가 “중앙에서 우리 충청도 사람 보고 소견과 오기가 없는 핫바지라고 그럽디다.

이번에 본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튿날부터 언론들은 ‘지역감정 악용’‘지역감정 부추기지 말라’고 신랄하게 JP를 비난했고 자민련내에서도 역풍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JP가 의도한 대로 적중했다. 자민련은 대전시장과 충남·북지사를 싹쓸이했다. 자민련 대변인실도 비공식적으로 이를 ‘핫바지 위력’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로 ‘지역등권론’ 등을 기치로 내세워 서울시장을 비롯해 광주와 전남·북지사를 휩쓸었다.

서울시장 선거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조순 후보가 선거운동 초반 무소속 박찬종 후보에게 15% 이상 뒤졌으나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이 지원유세에 참가해 서울시장 선거를 김영삼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로 몰아갔고 민자당이 김 이사장을 집중공격하면서 서울의 호남출신표가 집결돼 결국 조후보가 낙승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문둥이가 문둥이 찍어야지...”

그렇다면 언제부터 지역감정이 표로 연결되기 시작했을까. 지역감정을 조장해 선거전에 이용하려는 시도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 윤보선 후보가 맞붙은 1963년 제5대 대선때부터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박후보의 찬조연사로 나선 이효상(6·7대 국회의장)씨는 대구에서 “이 고장은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지만 임금을 배출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신라의 자랑스런 후예인 박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자”고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그래도 이때는 표가 동서로 쪼개지는 일은 없었고 여당이 농촌에서 우세를 점하는 ‘여촌야도’현상이 더 지배적이었다. 한달 뒤에 치러진 6대 총선에서도 공화당과 민정당은 지역별로 고른 득표를 했다. 삼선개헌 이후인 1971년 대선때엔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출신지별 지지도가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효상씨는 또 “문둥이가 문둥이 안찍으면 어쩔끼고…”“대구·경북에서 몰표를 쏟아부어 기어이 당선시키자.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는 등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김대중 후보측은 지역감정이 심각해지자 선거 막바지 대구 유세에서 “1963년 선거때 박대통령이 15만차로 이겼는데 이는 전라도에서 40만표를 이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1200년전 백제·신라시대로 돌아갈 것인가. 공화당의 망국적인 더러운 선거전에 좌우되지 말고 양심적으로 투표하자”고 호소했다. 대선 결과 박대통령은 경남·북에서 각각 66.9%와 75.6%를 얻은 반면 전남·북에서는 34.4%, 35.5%에 그쳤고 김대중 후보는 경남·북에서 32.1%, 23.3%를, 전남·북에서는 62.8%, 61.5%를 득표했지만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몰표현상은 없었다.


비판 불구 선거때면 어김없이 등장

그러나 유신에 뒤이은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인사와 지역개발 등에서 영남편중화가 극심해지면서 1987년 16년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된 13대 대선은 이른바 ‘1노3김’의 지역별 구도가 심각하게 드러났다.

선거결과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에서 각각 69.7% 64.8%를, 김영삼 후보는 부산 경남에서 56% 51.3%를, 김대중 후보는 광주 전남·북에서 94.4% 90.3% 83.5%를, 김종필 후보는 충남에서 45%를 얻었다. 전남·북에서 김영삼 후보는 불과 1% 1.5%를 얻었고 경남·북에서 김대중 후보는 6.9% 2.5%를 얻는데 그쳤다. 이후 총선과 대선때마다 ‘지역푸대접론’‘음모론’은 후보들이 애용하는 메뉴가 됐다.

일부 정치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모든 사건을 지역탄압으로 몰아가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하기도 한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의 경우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 대상에 꼽히자 “DJ정권의 홍위병이 나를 표적으로 삼은데 대해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교묘하게 반DJ정서를 부추겼고 민국당의 김광일 전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을 ‘괴수’라고 표현한데 대해 민주당이 형사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그렇다면 (이번 총선에서)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좋아해 숨겨진 속내를 드러냈다.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최근 잇따라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촉발시키는 것도 오랜 정치경험에서 터득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언론에서 비판을 하든 말든 선거때는 지역감정이 최상의 득표전략이라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신념이 이번 선거에서도 맞아떨어질 것인지, 불과 20여일뒤의 총선결과가 관심거리다.

송용회·주간한국부 기자


송용회·주간한국부 songy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