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들러의 시제품 제작에서 첫 모델인 MR 300, MR 500 핸들러가 현장에 설치되기까지는 피를 말리는 순간순간의 연속이었다.

정문술 사장은 “일본업체의 제품을 개조하거나 모방해서 만든 시제품을 부천의 S사에 소개하기 위해 차에 싣는데 다리 받침대가 흔들거리는게 눈에 들어왔어요. 어이쿠, 이게 왠 불길한 징조냐 싶어 눈앞이 캄캄했어요”라고 회고했다. 얼른 엔지니어가 차에 올라 S사로 향하는 길 위에서 볼트를 단단히 조였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든가. 다행히 시제품은 당시 S사에서 사용하고 있던 일본 테섹의 TO-92 핸들러보다 생산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나 3대를 주문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였다. 시제품은 그 순간만 넘기면 그만이지만 현장에 설치되는 기계는 낮이나 밤이나, 날씨가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대로 돌아가야만 했다.

“가슴이 새까맣게 탔어요.” 정문술 사장은 3개월간의 핸들러 개발기간에 겪은 고통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는 핸들러가 어떻게 쓰이는 물건이지도 모른 채 산업연구원와 KAIST를 들락거리며 자료조사에 들어갔다. 미국과 일본의 데이타베이스를 검색하면서 에어 베어링, 정밀 서브모터, 정밀 스태핑 모터, 고정밀 베어링 등 이름조차 생소한 부품에 대한 논문과 문헌, 카탈로그, 기술 및 특허 정보를 수집해 기술진에게 제공했다.


핸들러가 뭔지도 모르면서 개발

“늙은 사람이 일주일에 3일을 연구소에서 보내며 하도 극성을 부리니 연구원들도 불쌍했는지 도와주더라구요. 복잡하고 다양한 자료를 정리해서 엔지니어들이 즉석에서 참조할 수 있도록 갖다주었는데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요? 자식의 대학입시를 앞두고도 그렇게 마음을 졸이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어거지로 개발된 MR 300이 잘 돌아갈 리가 없었다. 엔지니어들은 아침마다 미래산업이 아니라 S사로 출근해 문제점을 즉석에서 수리하고 정비해야만 했다. 뒤이어 개발한 메모리 데스트 핸들러의 경우 일본제 어드밴테스트 핸들러를 싣고와서는 어떻게 돌리는지조차 몰라 다른 공장의 전문가를 퇴근 후 초빙해 운영하는 법을 배우면서 개발을 시작하기도 했다.

정사장을 괴롭힌 것은 부족한 기술만이 아니었다. 하청기업의 등을 치는 대기업의 행태는 정사장을 절망의 나락으로 몰았다. 핸들러 국산화를 의뢰해 사실상 미래산업을 살려준 것이나 다름없는 S사도 정사장의 목줄을 죄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시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기분에 젖는다. “ S사측에서 우리 기술진이 1년동안 목숨을 걸고 개발한 핸들러의 설계도면, 세부규격 등 모든 비밀을 다른 제작업체에다 넘겨주면서 이대로 한번 개발해보라고 주문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때 기분요? 다짜고짜로 구매부로 처들어가 고함을 질렀어요. ‘구매부장 어디있어? 목숨이나 다름없는 걸 제멋대로 빼돌려 남을 줘, 가만두지 않겠어’하며 소동을 벌였는데 그게 하청기업의 운명이죠.”


대기업 횡포 딛고 '장인' 수준에

대기업에 목숨과 같은 기계를 빼앗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미래산업을 창업하기전 금형을 생산하는 풍전기공 시절이었다. 전화교환기용 단속장치에 쓰이는 커넥터 부품을 생산하는 K전기에서 금형주문이 들어왔다.

원래 일본제 부품을 수입해 조립생산을 하고 있었는데 경쟁업체가 국산화에 성공하자 ‘앗, 뜨거워’라며 기술개발 및 금형제작을 정문술 사장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개발비용을 전액 부담하겠다고 했으니 조건도 좋았다.

그러나 대기업 사람들은 정사장보다 훨씬 약삭빨랐다. 개발이 끝나자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불평등 계약서를 코앞에 들이대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기가 막혔다.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놓는 철저한 배신이었다. 정사장은 더 버틸 여력도, 의욕도 없었다. 처절한 심정으로 풍전기공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1983년 2월 미래산업을 창업하기까지 2년이란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이제는 반도체 장비분야에서 ‘장인’수준에 오른 정문술 사장이지만 젊은 시절은 기술과는 전혀 관계없는 중앙정보부에서 보냈다. 5·16혁명 직후 특채로 들어간 중앙정보부에서 무려 18년을 근무하면서 다섯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고위급까지 오른 정보맨이었다.

그러나 12·12사태로 또한번 세상이 뒤집어지면서 그는 추위가 채 물러가지않는 거리로 내쫓겼다.

정보부 생활 18년은 사업가로 변신한 정문술 사장에게는 지울 수 없는 원죄로 다가왔다. 풍전기공을 운영하던 시절 납품한 기계에 대한 잔금을 독촉했더니 상대방은 정사장이 중앙정보부 빽으로 위협한다며 경찰에 고발하는 바람에 열흘씩이나 차디찬 경찰서에서 새우잠을 자야했다. 또 갑자기 세무관리들이 들이닥쳐 공장을 뒤지기도 했다.

정사장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속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한 가슴앓이 이야기도 중앙정보부 경력에 관한 것이다.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 개발에 매달리던 1988년이었다. 당시 기술개발주식회사(현 한국종합기술금융)에서 관리하는 국가보조 개발비를 타내기 위해 웨이퍼 검사장비 개발 사업계획서를 올린 뒤 워낙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업 검토 담당자가 “정보부 출신이면 다야? 말도 안되는 사업을 갖고와 사기칠려고만 해”라고 말해 심한 인간적인 모욕을 느끼기도 했다.


심혈 기울여 키운 공고출신 엔지니어들

1990년 트랜지스터 테스트 핸들러로부터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까지의 숨가쁜 성공은 미래산업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핸들러로 자리를 잡았다싶자 또 좀이 쑤셔왔어요. 벤처중독이지요. 도전할 만한 아이템이 없나 하고 찾고 있는데 핸들러와 함께 쓰이는 테스트 국산화에 미친 한 엔지니어가 찾아왔어요.”

테스트는 반도체 칩에 순간적으로 전기신호를 보내 되돌아오는 신호를 정밀하게 분석해 각종 성능검사를 하는 초정밀 기계다.

미국의 테다라인, 메카테스트 등이 테스트 장비분야를 장악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테다라인으로부터 기술도입을 시도했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고서라도 테스트 기술을 가져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절대로 첨단기술을 주지않습니다. 그들이 넘겨줄 때는 이미 지나간 것이지요.”

미래산업은 기술도입을 포기하고 기술적 난이도가 한단계 낮은 번인 테스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1996년 개발에 성공했다.

잇달아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해서 미래산업에 유능한 기술자가 몰려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래산업의 직원수는 300여명중 3분의1이 연구원이고 그중 10여명이 핵심 엔지니어다. 10명의 엔지니어중 공고 출신자가 상당수다. 정사장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인재들이다. 그들 밑에 공학박사며 석사들이 일하고 있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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