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에 ‘한참’이란 말이 있다. ‘시간이 상당히 걸리(지나)는 동안’이란 뜻이다. 이 말은 본디, 두 역참(驛站)사이의 거리를 가리키던데서 비롯된 말이다.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 사이를 오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쓰던 말이다. 말하자면 공간 개념이 시간 개념으로 바뀐 경우라 하겠다.

역참(驛站)이라 함은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는 관가 등에서 먼 지방에 급한 공문이나 기별(奇別, 寄別)을 전달하거나 할 때에 주로 말을 이용했다. 이때 일정한 거리마다 지친 말을 갈아타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을 역참(驛站)이라 하겠다.

각 역참에 딸려, 공문 또는 기별을 가지고 역참 사이를 나르는 사람을 파발꾼(擺撥)이라고 했으며 파발꾼이 타는 말을 파발마(擺撥馬)라고 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질풍처럼 달려가는 파발마. 중요한 공문서를 가슴에 품고 날듯이 걸음을 재촉하는 보발(步撥).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엔 파발꾼이 말을 타고 급한 문서를 날랐다. 암행어사 출두를 외칠 때 쓰던 마패도 사실은 파발사가 있는 역참에서 말을 징발할 때 사용하던 물건이다. 파발은 한양을 거쳐 평안도 의주까지 수송되었고 이것을 서발이라 하였다.

은평구의 구파발(舊擺撥)은 본디 우리나라 3대로(三大路)가운데 ‘서발’이 대기하던 파발터에서 비롯된 땅이름이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파발제의 조직은 지역에 따라 직발(直撥)과 간발(間撥)이 있었고 전달 수단에 따라 기발과 보발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대동지지’에 수록된 파발의 조직을 보면 ‘서발’은 의주에서 한성(서울)까지 1,050리의 직로(直路)에 기발로서 41참을 두었고, 그 밖의 간로(間路)에 보발로써 45참을 두었다. 또 북발은 함경도 경흥에서 한성까지 2,300리의 직로에 보발로써 64참을 설치하고 간로에 역시 보발로써 64참을 설치하고 간로에 역시 보발로써 32참을 두었다. 그리고 남발은 경상남도 동래에서 한성까지 920리의 직로에 보발로써 31참을 설치하였다.

파발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발마와 파발꾼의 확보였다. 발참의 말은 역마, 욕장마, 군마로써 보충하였지만 민간에서 차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라시대엔 통신과 수송기능까지 맡았으나 조선조 선조때 통신 위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기발은 25리마다 역을 설치, 갈아탈 수 있는 말 5필 정도를 길렀으며 보발은 30리마다 두어 군정들이 문서를 전달했다. 때문에 대륙으로 통하는 길목의 옛파발(舊擺撥)이 있던 구파발 인근에 역말(驛村)이 있었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그 구파발에서 파발마가 쏜살같이 내닫던 자리에, 지금은 땅속으로 말이 아닌 쇠말(鐵馬:地下鐵)이 3분도 채 안돼 줄줄이 달리는가 하면, 매년 10월1일엔 옛 파발의 재현 행사가 열리고 있으니 옛 말에 ‘한참’이란 말이 그리 길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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