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앞둔 지구당 대회…‘묻지마 통과’

‘묻지마 투자’는 벤처에 대한 투자 열풍을 가리키는 유행어. 하지만 ‘묻지마’란 수식어가 투자에서만 통용되는 건 아니다. 정치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총선을 앞둔 1여3야의 지구당 대회는 ‘묻지마 지지’와 ‘묻지마 박수’의 경연장이다.

최근 무더기로 열리고 있는 각 당의 지구당 대회는 총선에 출마할 지역구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 말이 선출이지 사실은 지역구의 지지자들이 모여 중앙당에서 공천한 후보를 기계적으로 추인하는 자리다. ‘단독 입후보에 100% 찬성’이란 ‘비민주적 현상’이 지구당 대회에서는 지극히 당연스럽게 벌어진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 속에서 ‘공산당식 당대회’가 만개한 셈이다.

3월15일 오후. 모 정당 현역의원이 수성을 노리는 서울 지역의 한 지구당 대회가 열리는 예식장 앞. 대회가 열리기 20여분 전부터 사람들이 한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역구 당원들이다. ‘선거법 위반 예방·단속’이란 글자가 쓰인 선관위의 봉고차도 일찌감치 주차장에 자리잡았다.

곧이어 나타난 공천자가 예식장 입구에서 당원들을 맞기 시작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일일이 악수를 청하고 때론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주차장이 차량들로 완전히 들어찬 3시께 중앙당에서 나온 중진급 의원이 입구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행사가 시작됐다.

당총재와 후원회 회장이 보낸 화환이 전면을 장식한 예식장 홀에는 200여명의 당원이 개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에서 청년에 이르기까지 연령층도 다양했다. 여성이 절반 가량. 참석한 남자들은 직장출근을 않는 지구당 당직자와 자영업자가 대부분이라는게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박수소리와 함께 ‘일사천리’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되는 대회는 자못 엄숙해 보였다. 중앙에서 공천받은 지구당위원장이 아예 지구당 간부 소개까지 맡았다. 내빈과 수두룩한 지구당 부위원장들, 10여명의 동책임자까지 일일이 한마디씩 붙여 소개하는데 걸린 시간이 19분.

메인게임에 앞서 오픈게임이 시작됐다. “이번 대회의 진행을 맡을 임시 의장을 선출하겠습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 사회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뒷쪽에 서있던 동책임자 한명이 “동의있습니다”라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XXX씨가 원만한 대회진행을 위해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만장일치 박수로 선출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수소리가 터져나오자 사회자가 말을 받았다. “이의없습니까?” 다시 박수소리가 장내에 진동하면서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만장일치로 XXX씨가 임시의장에 선출됐음을 선포합니다.” 박수소리와 함께 의사봉이 “땅, 땅, 땅”울렸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1~2분.

임시의장이 자리잡고 앉자 메인게임이 이어졌다. 지구당위원장, 다시말해 총선에 출마할 지구당 후보가 선출될 순서. “당규에 따라 30명 이상의 지구당원 추천을 받아 위원장에 입후보한 사람은 XXX동지 한명 뿐입니다. 약력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대의원 여러분,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요.” 역시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있습니다”란 말과 함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사람 정치관 같은건 몰라요”

“XXX동지는 지구당과 국가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했습니다. 만장일치로 지구당위원장에 선출할 것을 동의합니다.” 박수가 터지면서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이의없습니까?” 장내 곳곳에서 “없습니다”가 연발됐다. 사전에 짜여진 각본이 있고 이에 따라 당직자의 좌석까지 고루 배정해 놓은 듯 했다.

다시 사회자. “그러면 시간관계상 만장일치 박수로 통과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선도자의 박수에 맞춰 장내가 떠나갈 듯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지구당위원장에 XXX동지가 선출됐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의사봉 소리에 박수소리가 묻혔다. 걸린 시간은 불과 수분.

선출된 위원장의 사례인사와 총선승리를 다짐하는 연사의 축사가 길게 이어졌다. 간간히 선도자의 박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제히 박수를 치는 당원들의 얼굴에는 별로 생기가 없어 보였다. 축사가 길어지면서 당원들의 표정에도 지루하다는 표시가 역력해졌다. 일부는 식장밖 라운지로 나가 주최측이 제공한 음료수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댔다.

“언제 입당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피했다. 위원장과 동갑이라는 50대 남자(자영업)의 이야기. “X의원과는 오랜동안 산악회 활동을 같이 했어요. (X의원의 정치관을 묻는 질문에)그런건 잘 몰라요. 그런 얘기도 않고. 그냥 자주 산에 같이 다니고 하니 좋지요.”

이날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당원인지, 당원이라면 언제 입당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계처럼 당직자의 박수에 맞춰 손바닥을 두드리는 상당수 참석자의 모습에서 정치적 열정은 찾기 어려웠다. 그 자리에서 ‘축제’란 단어는 더욱 떠올릴 수 없었다. 1시간40여분 뒤 참석자들은 우르르 예식장을 떠났다. 민주주의 축제 속에서 벌어진 ‘공산당식 지구당대회’는 이렇게 끝났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