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초에 정도전(鄭道傳)은 한양의 성문과 중앙의 종루 이름을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지켜야 할 다섯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의 오상(五常:五行)을 따서 붙였다. 그리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홍지문(弘知門), 보신각(普信閣)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서울의 4대문이라 하면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만을 떠올린다. 어찌된 일인지 ‘북대문’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는 북대문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설과 속설에 휘말려 창건한지 18년만에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사적 10호)은 북한산 동쪽 산마루턱의 성북구 성북동 계곡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숙정문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운지 5년만인 1396년에 완공하였던 것. 그러나 당시 풍수학자 최양선(崔楊善)이 “동쪽, 서쪽 봉우리는 정궁인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닫아 두어야 한다”고 건의,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에 폐쇄하였다.

그 뒤 가뭄이 심하면 음의 기운이 강한 숙정문을 열어 비가 오기를 기원했으며 장마가 심하면 닫았다고 한다. 또 순조때 실학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은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篆散袴)’에 ‘숙정문은 음의 자리에 있어 열어두면 서울 장안의 여인네들이 바람난다’고 쓰고 있다. 이는 정월 보름 이전에 숙정문을 세번 오가면 액운이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의 나들이가 많아지자 남정네들도 모여들어 풍기가 문란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속설이 퍼진 것이라 한다.

어찌되었던 조선왕조는 왕도를 정하면서 철저히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도시계획을 구상했던 것이다. 때문에 서울의 도성이나 궁의 배치, 문루는 물론 심지어는 하천의 흐름, 산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풍수와 관련지어 그 의미와 상징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풍수에 대한 이해없이는 서울의 유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숙정문은 태종 13년에 폐쇄된 채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년)에 동쪽으로 약간 옮겨 석문만 세웠던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달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의 숙정문은 군부대의 바깥 쪽에 있어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채 굳게 잠겨있다. 역시 숙정문은 예나 지금이나 폐쇄되게끔 되어 있는가 보다!

숙정문이 굳게 닫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서울 장안 남녀의 바람끼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으니 어쩐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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