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2-3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아침 7시면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으로 출근했으나 요즘에는 일주일에 2-3차례만 집무실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나마 간략한 보고를 받은 다음에는 곧바로 집으로 향한다. 최근 청운동에서 가회동으로 이사한 뒤에도 회사에 등장하는 횟수는 비슷하다. 집무실을 찾지 않을 때는 김윤규 현대건설사장등 주력계열사 사장이 직접 집으로 찾아가 중요한 사항을 보고한다.

85세의 나이. ‘오는 세월, 지팡이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비서 한 명이 옆에서 어깨를 부축하는 정도였으나 요즘에는 두 명이 양쪽에서 부축해야 할 만큼 다리 힘이 빠졌다. 그렇지만 ‘휠체어를 타는게 어떻겠느냐’는 말에는 호통을 치는 등 기백은 여전하다는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MK쿠데타’이익치 회장 좌천

회사에 나타나지 않을 때 왕회장(정명예회장의 애칭)은 주로 자택에 머문다. 간혹 서산과 울산 등 지방을 다닐 때도 있지만 대부분 집에 하루종일 머문다. 예전에는 책도 많이 읽었지만 요즘에는 시력이 좋지 않아 TV를 자주 본다.

케이블 TV인 YTN을 보다가 재미없다고 느껴지면 ‘사극’을 즐겨 시청한다. ‘설중매’‘인현왕후’‘대원군’ 등 과거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프로그램을 구입해다가 시청한다는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는 사극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세자였던 동생 방번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 스스로 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다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세종으로 바꿔야 했던 그의 심리적 갈등.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했으나 자식의 흉한 죽음을 쓸어안아야 했던 세조.

우여곡절 끝에 대권을 거머쥐었으나 자제력을 상실해 쫓겨난 연산군. 숱한 혈통 가운데 세자로 선택받기 위해 형제간 피비린내 나는 암투를 벌여야 했던 조선조의 역대 왕손들…. 왕회장은 사극을 통해 제왕들이 세세만년 왕조를 이어가기 위해 세자를 선택하는 ‘세자 간택의 지혜’를 배운 것은 아닐까?

3월 중순 터져나온 현대증권 최고경영자 교체 파동은 ‘현대판 왕자의 난’이라 일컬어질 만큼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파동은 3월14일 밤 이익치 현대증권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시키는 인사가 단행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른바 MK(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영문 이니셜)측이 주도한 인사로, MH(정몽헌 현대전자 회장의 영문 이니셜)가 해외에 나가있는 사이 대표적인 MH측 인사인 이회장을 ‘좌천’시킨 것이다. 이에 이회장과 MH측은 이번 인사를 ‘MK군의 쿠데타’로 간주하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현대증권을 중심으로 한 MH측 인사들은 이번 인사의 부당성을 언론에 호소하기까지 했다. 미국에 출장 중인 정몽헌 회장도 15일 소식을 접하곤 그룹 구조조정위원회 김재수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돌아갈 때까지 인사를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MH, 귀국 3시간만에 ‘인사안 백지화’

다음날인 16일. 이익치회장은 현대증권 본사로 ‘출근 투쟁’을 강행했다. 지난해 12월 업무정지가 내려진 뒤 처음으로 출근한 이회장은 직원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계속 열심히 일하라”는 메시지를 남긴 뒤 다음날인 17일 오전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회장은 여건상 정몽헌회장과 직접 만나지 못했으나 수차례 전화통화를 통해 대책을 숙의했다.

이 와중에 왕회장은 지방행을 거듭했다. 16일 울산공장을 방문한데 이어 다시 5일만인 21일 서산으로 내려가 생각에 잠겼다. 22일 서울에 올라온 정명예회장은 청운동 집을 사실상 장남인 정몽구회장에게 물려주고 가회동 새 집으로 이사했다. 23일에는 정명예회장의 동생, 아들, 조카 등 40여명의 정씨 일가가 모여 ‘집들이 모임’을 가졌다. 이때부터 상황은 ‘MK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MH측도 만만치 않았다. 집들이가 있던 23일 오후 4시 이익치 회장이 ‘반격채비’를 마치고 중국에서 돌아왔다. 이회장은 귀국 직후 “인사를 직접 들은 바 없다”는 말로 다시 한번 이번 인사를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어 시내 모처에서 MH측 인사들과 대응방안을 논의한 이회장은 24일 오전 다시 현대증권으로 출근을 강행했다.

이번 파동의 백미는 MH의 귀국. 24일 오후 2시 귀국한 정몽헌 회장은 한시간 가량 현황을 보고받은 뒤 오후 4시부터 30여분동안 가회동 자택에서 정명예회장을 면담했다. 그때까지도 외부에서는 ‘무게중심이 여전히 MK쪽에 실려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그러나 오후 5시 김재수 구조조정위원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익치회장은 현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정몽구회장은 현대 경영자협의회 회장직에서 면한다”고 발표했다. 인사안이 백지화되면서 MH의 승리로 결판이 난 것이다.


MH 승리로 끝난 '왕자의 난'

그러나 MK도 그냥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는 26일 아침 왕회장을 찾았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고갔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회동 결과는 오후 2시30분에 있은 정순원 현대자동차 기획조정실장의 기자회견에서 나타났다. “정몽구 회장의 현대경영자협의회 회장직 면직이 번복됐다. 앞으로 그룹 최고경영자 인사는 정몽구·정몽헌 회장간의 협의를 거친다.”

이제 사태는 인사파동의 시점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MK가 주도한 ‘왕자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MK도 ‘귀양길’을 떠나기 직전에 ‘상왕’(上王) 정 명예회장의 덕에 살아났다.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승부는 나지않았지만 결과적으로 MH의 위세를 내외에 알렸다는 점에서 이번 싸움은 MK의 판정패다. 그렇기 때문에 ‘제2, 제3의 왕자의 난’이 재연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이번 파동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회장과 후계구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그룹은 왕회장을 정점으로 MK, MH와 정몽준(MJ) 현대중공업 고문이 삼각분할 구도를 이룬 가운데 나머지 ‘영’(永) 및 ‘몽’(夢)자 항렬이 방계기업 또는 그룹을 이끌고 있는 양상이다.

왕회장은 지난 몇년간 아들들에게 계열사 경영권을 많이 넘겨주긴 했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오너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말 기준으로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중공업과 현대건설 지분의 각각 11.56%와 4.49%를 갖고 있는 최대 주주다. 정몽구회장은 현대자동차와 현대정공을 장악하고 있다.

또 현대자동차는 기아자동차 지분의 40.18%, 현대캐피탈의 86%를 각각 갖고 있다. 건설과 전자부문을 맡고 있는 5남 정몽헌회장은 현대건설 지분의 3.67%를 갖고 있어 정명예회장에 이은 2대 주주이자 13.44%의 지분을 가진 현대상선의 최대 주주다. 현대상선은 또 현대전자 12.7%, 현대종합상사 6.2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6남인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은 현대중공업 지분의 8.06%를 가진 2대 주주로 향후 중공업부문 분리와 함께 오너 역할을 계속할 전망이다.


부끄러운 전근대적 경영패턴

세 아들이 자동차와 전자, 건설, 중공업부문을 각각 나눠 맡는다는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금융·서비스 부문. 금융·서비스 부문의 대표 계열사격인 현대증권의 최대주주는 16.6% 지분을 가진 현대상선이지만 왕회장은 금융부문에 대해 ‘전문경영화’를 표방, 불씨를 남겨두고 말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아들은 모두 8명. 왕회장의 장남 정몽필과 4남 정몽우는 각각 1982년과 1990년 사망했다. 결국 그룹의 후계권은 2남인 정몽구, 3남 정몽근, 5남 정몽헌, 6남 정몽준 등 가운데 선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중 3남인 정몽근씨는 신체적 결함 때문에 일찌감치 ‘대권 후보’에서 멀어져 있었다.

왕회장은 수년간 고심 끝에 1996년 1월 그룹의 후계권을 정몽구회장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경영능력이 그의 기대 수준에 못미쳤는지 2년2개월 후인 1998년 3월 정몽헌회장을 공동 회장으로 앉혔다. 이후 3년동안 대권을 놓고 두 형제의 암투가 계속되다가 현대증권 인사파동에서 정면충돌하게 됐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정씨 가문의 혈통은 정몽구회장이 잇되 그룹 경영에 대해서는 아직 ‘세자 간택’을 하지않고 있는 셈이다. 왕회장이 MK에게 자신이 42년동안 살아온 청운동 집을 물려주었지만 그룹 경영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현대증권 인사파동은 현대그룹과 한국의 재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다. 우선 그동안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제경영’이 여전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현대증권에 지분이 단 한 주도 없는 고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최고경영자를 하루 아침에 내정했다가 열흘만에 뒤바꾸고 또 그룹의 회장직이 왔다갔다 하는 등 정상적인 주식회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재벌회장에게 이사회나 주주총회는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원래 정주영 명예회장은 한번 결정하면 일정기간 동안은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일정기간’이 과거의 2-3년에서 열흘로 단축된 것을 두고 현대그룹 내에서조차 ‘왕회장이 예전과 다르다’는 말이 확산되고 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황제경영의 폐해

현대그룹의 ‘왕실’에서 발생한 인사파동이 세계적인 화제기사로 전파되면서 현대그룹의 주가는 요동쳤고 외국 투자자들마다 ‘한국기업은 아직 멀었다’며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또 재계의 한 인사는 “가뜩이나 재벌 오너 체제에 대한 국민적 비난과 불신이 가중되는 마당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사 파동이 생긴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라며 강한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재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현대의 인사 파동은 일개 기업의 단순한 인사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전제, “재계 전체에 대해 더욱 강도높은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게 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이번 파동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마지막 재산정리 과정’에서 불거져나온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현대의 경영스타일과 연결지을 수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의 황제경영이 현대그룹에 국한되지 않고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다른 그룹에도 팽배해져 있다는 점이다.

한국방송대 김기원 교수는 “황제경영이 종식되고 전문경영인이 오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하게 되는 날 우리는 진정한 경제민주주의를 이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정규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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