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의 혁명.’

무슨 뜻일까. 대부분의 독자들은 “4월13일 총선에서 정치개혁을 원하는 일반 시민들의 바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최근 속옷, 혹은 언더웨어(under wear) 분야에 불어닥친 세대교체의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총선연대 등 시민단체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 정치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사람들의 ‘은밀하지만 소중한 부분’을 지켜온 언더웨어 분야에서는 세대교체 바람이 완연하다.

언더웨어의 세대교체 바람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업계에서 ‘백물 팬티’라고도 부르는 ‘흰 삼각팬티’의 급격한 위상 추락이다. 국내 최대의 언더웨어 업체인 BYC 홍보실 신현인 차장은 “국내 팬티시장에서 백물 팬티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 10%가 조금 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팬티라는 제품의 특성상 실제로 입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매출동향으로만 따진다면 거리를 활보하는 성인 남성의 10명중 1명만이 전통의 ‘흰 삼각 팬티’를 입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신차장은 “아직도 정부의 공식 물가통계 산정에 ‘백물 팬티’가 주요 요소로 남아있는 것을 감안하면 시장에서는 이미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연간 1조2,000억원에 달하는 국내 언더웨어 업계에서는 1999년 말을 고비로 ‘3세대 언더웨어’로 중심축이 넘어가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1960년대 이후 국내에 본격적으로 내의가 보급된 속옷들은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 또 지난 40여년 동안 1세대 속옷이, 2세대를 거쳐 3세대로 진화하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1960년대 초반부터 1980년 후반까지 유행했던 ‘1세대 언더웨어’. ‘1세대 언더웨어’는 은밀, 단순, 소박, 획일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당시 속옷은 ‘겉옷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옷’이라는 인식 때문에 디자인과 소재와 색상 등이 단순하고 소박했다. 따라서 오로지 위생과 보온만이 강조되었다.

또 소형, 중형, 대형 등 사이즈 구별만 있었을 뿐 외형은 똑같았는데 러닝이나 팬티는 천편일률적으로 흰색이 대부분이었고 방한 내의는 ‘빨간 속옷’이 대다수였다.

당시 속옷은 효도의 상징이기도 했다.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의 1순위가 속옷이었다. 따뜻한 내의는 건강이라는 등식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1세대 언더웨어 단계에서도 점진적 발전은 계속 이뤄졌다. 특히 1980년대 말에는 고전적 의미의 기능을 최대한 살린 보온메리, 에어메리 등이 대히트를 치기도 했다.


1990년대 패션내이 등장

하지만 자가용 보유대수가 늘어나고 난방시설이 확충, ‘보온’과 ‘위생’이라는 전통적 기능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2세대 언더웨어’가 출현했다. 바로 패션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패션내의의 선두주자는 주병진 사장의 ‘좋은 사람들’이었다. 1990년 업계 후발주자로 뛰어든 ‘좋은 사람들’은 철저한 마케팅 조사를 통해 ‘패션내의’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좋은 사람들’은 당시 업계를 주름잡던 흰색 내의를 포기하고 과감하게 ‘유색 내의’를 선보이는 한편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과 광고전략을 펼쳐 젊은 소비자층의 폭발적 호응을 얻어 냈다. 매년 20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한때 BYC, 쌍방울과 함께 내의업계 ‘빅 3’였던 태창을 제치고 업계 3위업체로 도약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1990년대 국내 언더웨어 시장은 ‘좋은 사람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BYC가 스콜피오, 쌍방울이 트라이, 빅맨 등 패션브랜드를 잇따라 내놓는 등 ‘패션내의’를 중심으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패션내의’의 뒤를 이어 1999년말부터 등장한 ‘3세대 언더웨어’는 2000년 현재 한국 경제의 축소판이다. 즉 ‘3세대 언더웨어’는 합리적 소비보다는 감성적 소비를 중시하는 N세대의 특성과 유난히 건강을 중시하는 세태가 적절히 혼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쌍방울 판촉팀의 박현주 대리는 “2000년 언더웨어 시장에는 ‘기능성 내의’가 강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대리는 “원적외선이 방출돼 습도를 조절해준다는 진흙 내의, 피부노화를 방지하고 신진대사를 촉진해준다는 세라믹 내의, 습도조절과 냄새제거 기능을 지녔다는 황토 내의, 세균번식을 막아주는 냄새를 없애주는 참숯 내의 등 다양한 기능과 소재의 제품이 시장에 등장했다”고 말했다.


기능성, 이벤트성 상품 인기

‘3세대 언더웨어’의 또다른 특징은 이벤트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N세대의 경우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선물로 속옷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이른바 수능 팬티, 커플 팬티, 밸런타인 밴티, 크리스마스 팬티 등 이벤트성 상품이 때를 맞춰 등장하고 있다.

신세계 백화점 내의담당 머천다이저인 유지영 대리는 “수능시험에서 답을 잘 찍으라는 의미로 포크를 그려넣은 팬티, 어두운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I Love You’라는 글씨를 새긴 야광 팬티, 상대방의 띠에 해당하는 동물그림을 그려넣은 팬티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국능률협회 이준엽 박사는 “10~20대 젊은 소비자의 구매패턴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감성적”이라고 말했다. 이박사는 “요즘 학계에서는 그들이 왜 언더웨어에 글이나 독특한 무늬를 새겨넣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강하다”고 말했다.

지난 40여년간 한국인의 바지와 치마 속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엄청난 변화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같은 변화는 전통적 농경사회였던 한국 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급격하게 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었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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