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의 역사가들은 1928년을 ‘인류와 박테리아의 영원한 전쟁이 시작된 해’로 기록할 것이다. 1928년 영국의 세균학자인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배양하다가 우연히 푸른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잡아먹는 장면을 목격, 인류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이후 인류는 페니실린 등 항생제를 무기로 삼아 그동안 무수한 생명을 앗아갔던 박테리아를 정복해나갔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인류의 진격은 도처에서 박테리아의 역습에 직면했다.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소위 ‘슈퍼 박테리아’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인류가 만든 가장 강력한 항생제인 반코마이신도 이겨내는 ‘황색포도당구균(VRSA)’까지 등장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강력한 항생제라도 결국은 이겨내는 박테리아의 생존법이 한국 경제에도 재연되고 있다. 바로 재벌이다. 정부의 설익은 재벌정책 때문인지, 아니면 재벌의 뛰어난 생존능력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6공화국→문민정부→국민의 정부’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벌정책의 수위는 높아졌건만 여전히 재벌은 더욱 커지고, 그 힘은 더욱 막강해지고 있다.


여전한 족벌경영

실제로 ‘국민의 정부’출범 이래 구조조정을 위한 권력의 드라이브는 쉴새없이 계속됐다.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대통령앞에 늘어서 개혁에 동참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했다. 또 계열사 매각과 합병 등으로 부채비율과 몸집을 줄이고, 상호 채무보증 철폐 및 사외이사 도입 등으로 겉모양새를 바꾸었다.

그러나 모두 겉치레였다. 2년이 지난 2000년 3월 현재 현대그룹 후계싸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재벌의 본성과 실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총수 개인이 지분과 법적 절차를 무시한채 그룹 전체를 전횡하는 ‘황제경영’, 선단식 경영체제의 근간인 돈줄을 장악하려는 ‘금융지배욕’, 공개된 상장기업을 2세에게 상속하는 가업으로 여기는 ‘족벌경영’ 등 재벌체제를 관통하는 핵심 메커니즘은 오히려 더욱 공고해졌다.

우선 황제경영. 인사파동의 발단이 된 현대증권의 경우 현대그룹측 지분은 우리사주를 포함해도 22.9%(2월말 현재)가 전부다. 더구나 ‘최종 인사권자’로 나선 정주영 명예회장은 단 1주의 지분도 직접 소유하지 않고 있다. 상법에 따르면 회사 경영진의 임명은 이사회의 고유권한이지만 지분도 없고 임원으로 등재되지도 않은 정 명예회장이 77.1%에 달하는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의 뜻을 무시하고 최고경영자의 인사를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재벌체제의 전근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늬만 전문경영인체제

기업의 경영권을 호주상속하듯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족벌체제 역시 국민의 정부 이후 오히려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현대, 삼성, LG, SK그룹 등 대부분의 재벌은 창업주가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을 당연시여기고 있다. 왕조시대의 임금이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는 세습과 다를 바 없다. 30대 그룹 중 부도 및 워크아웃중인 대우, 동아, 고합, 신호그룹과 창업주가 현역으로 뛰고 있는 롯데, 동부그룹 등을 제외하고는 국내 대부분의 그룹에서 경영권이 2세에게로 승계됐다.

그룹별로 보면 LG, 한진, 쌍용, 한화, 대림, 코오롱, 진로, 아남그룹 등은 가부장적 전통에 따라 장자가 경영권을 상속했다. LG그룹의 경우 창업주 구인회 회장→구자경 회장→구본무 회장 등으로 3대째 이어지고 있으며 현대와 삼성 등은 작은 아들들이 상속했다. 현대그룹은 최근 차남(정몽구 회장)과 5남(정몽헌 회장)이 후계다툼을 벌여 5남이 대권을 쟁취했으며, 삼성은 고 이병철 회장의 3남 이건희 회장이 승계한 케이스다.

SK그룹은 외형상 손길승 회장의 전문 경영인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최종현 전회장의 장남 최태원 SK㈜회장의 대권 승계까지 이어주는 과도체제에 불과하다. 이는 제일제당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무늬만 전문 경영인체제인 것이다.

이처럼 경영권 세습이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상속세법 등이 허점투성이고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겨냥한 기업 지배구조 개혁이 겉돌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조 한성대교수는 “삼성 이회장의 장남 이재용씨의 경우 최근 3년간 비상장사의 공개전 주식을 헐값으로 인수하는 등의 방식으로 4조원을 벌었지만 세금은 고작 16억원만 냈다”며 “편법상속 및 증여를 막기 위해서는 실제 상속이 이루어졌을 경우 상속 및 증여세법에 해당 조항이 있든 없든 무조건 상속세를 부과하는 포괄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재벌개혁 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금융산업에 대한 재벌의 장악력 역시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지난 2년동안 64조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된 금융구조조정이 결과적으로 재벌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재벌불사신화 여전

증권, 보험, 투신 등 제2금융권은 온통 재벌간판으로 뒤덮이고 있다. 1997년만 해도 22.5%(수익증권 수탁고)에 불과하던 현대, 삼성 등 4대 재벌의 투신업계 시장점유율은 이제 35.3%(2월말)까지 늘어났다. 29개의 크고 작은 생명보험사가 난립했던 생명보험시장도 삼성, SK, 금호그룹에 이어 현대그룹이 입성에 성공, 재벌끼리의 쟁탈전이 예고되고 있다. 삼성과 LG가 36%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신용카드시장에는 현대와 SK, 롯데 등 재벌그룹이 줄줄이 뛰어들 채비다.

동일인 지분한도(4%)로 빗장을 걸어놓은 은행도 ‘주인 찾아주기’라는 명분 하에 언제든지 삼킬 태세를 갖춰놓고 있다. 이미 한미·광주·부산은행 등은 지분참여를 통해 교두보를 확보해놓은 상태다.

이처럼 재벌이 금융에 뛰어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헐값에 부도채권 사주기, 싼 이자로 돈 빌려주기, 계열사 주가띄우기 등 고객이 맡긴 돈으로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고 총수의 지배권을 세습하기 위한 온갖 형태의 편법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대사태를 계기로 다시한번 칼을 빼들었다. 정부는 최근 12월 결산법인의 주주총회가 끝나면 4~5월에 재벌을 포함한 대기업의 지배구조개선 상황에 대한 대대적 점검을 벌일 방침이라고 밝혔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대사태는 정몽구·정몽헌 회장이 금융계열사를 서로 장악하려는 암투에서 비롯됐다”며 “하반기로 잡혀있는 현대그룹 등 재벌금융 계열사에 대한 특별검사(연계검사)를 이르면 5월부터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부는 또 구조조정본부 등 특정 목적을 지닌 그룹차원 조직이 개별 계열사의 인사에 개입하며 변질·운용되는지 여부 등 운용실태를 함께 파악하고 주채권은행과의 약정상 위배 여부도 검토할 방침이다.

정부가 다시 한번 ‘확실한 재벌개혁’을 부르짖고 있지만 결국은 ‘슈퍼 박테리아에게 무릎꿇은 항생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