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어디에 있으신가요?”“집? 지구가 다 내 집이오. 내가 있는 데가 집이고 본가지 뭐." “생활규칙 같은건 없으시구요?”“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눈 감으면 밤이고, 눈 뜨면 그게 아침이죠 뭐.”

선문답이 아니다.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수준이 그 정도다. 단학선원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진 (재)한국인체과학연구원 이승헌 원장(48). ‘알고보면 독도만 우리 땅이 아니라 온 지구가 우리 땅’이라는 그는 스케일부터 남다르다. 정신적으론 온 우주와 지구가 그의 활동무대다.

지난 3월13일 한달간의 일정으로 고국을 방문한 그는 실제로 세계의 명상계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중 하나다. 국내에 심은 단학선원만 300여개, 미국에서 활동중인 단학지도자도 300여명에 이르고, 그외 캐나다 영국 일본 베트남 등 온 지구촌을 명상의 열풍 속으로 끌어들인 주인공이다. 특히 지난 2월에는 ‘2000 밀레니엄 세계명상축제’를 개최, 한국을 21세기 정신문화의 종주국으로 ‘상표등록’하겠다는 포부를 보여주기도 했다.


기에너지 이용한 능력의 극대화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그를 단학선원의 창시자로만 얘기하는 것은 조금 진부하다. 그 사이 그가 발표한 ‘업그레이드 버전’인 ‘인체과학연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명상수련가뿐만 아니라 의사와 과학자가 공조체계를 이루고 있는 이 인체과학연구 분야의 최근 화두는 ‘뇌호흡’. 그간에 알린 단학과 명상도 사실상 이를 위한 전지작업에 불과하다.

요체는 인간의 상상력과 기(氣)에너지를 이용해 우리 몸, 특히 뇌의 감각을 깨움으로써 보다 생산적인 삶을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다. 간질 등 온갖 질병을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뇌는 특히 그 크기는 작아도 우리 몸 안에서 산소의 3분의1이나 필요로 하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기에너지를 이용해 뇌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고 뇌파도 안정시켜주는 등 뇌호흡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신체적으로 아픈 곳은 물론이고 성격을 바꾸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특히 채 포장을 뜯지도 못한 우리의 잠재능력까지 끄집어내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하죠. 건강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우수한 인간으로 바꿔놓는겁니다.”

그 자신도 이미 몇가지 아이디어의 포장을 끌러놓았다. 전래의 명상요법에다 과학을 접목시키는 것이 그의 특기. ‘마음을 찍는 사진’ 오라컴도 그가 아이디어를 내어 만든 작품이다. 이 연구원을 찾는 사람들이 수시로 접하게 될 이 장치는 PC를 이용해 인체의 기 흐름을 촬영, 그 자료를 통해 그 사람의 건강과 적성, 재능, 심지어 진로까지 예견하는 놀라운 기술이다.

기에너지의 원리뿐 아니라 과학적 논리도 탄탄하게 밑받침돼 있다.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즉 제온과 자력 전류를 이용하는거지요. 예를 들어 뭔가 죄를 지어 마음이 불안한 사람은 혈압과 체온이 변하거나 심하면 근육경련 등이 일어납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게되면 맛있는 음식을 볼 때처럼 침이 많이 분비되고요. 이렇게 감정의 상태에 따라 각각 달라지는 신체의 반응을 세밀하게 측정해 역(逆)으로 분석하는거죠. 그런 인체의 색깔을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걸 알 수 있습니다. 기질과 성격, 적성 뭐든 파악되죠. 예를 들어 녹색 오라는 치료능력(Healing Power)을 뜻하는 것으로 의사, 간호사거나 그 직업이 맞는 사람에게 나타나요. 직접 테스트해보면 참 신기할 겁니다.” “꼭 검사를 받아보라”며 강조하는 이원장, 그는 어땠을까? 본인의 검사 결과를 물어보자 답은 총천연색 무지개가 나타났다는 거다. 정말 할 일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다.


환시·환청속에서 단학 터득

그가 단학을 선보인 것이 20여년 전이다.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고민을 풀겠다고 평생 매달리다보니 어느 순간 그것을 만났을 뿐이다. 자신의 문제란 도무지 이상한 환청과 환시로 정신을 집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충북 천안의 한 깊은 산골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은 ‘마음 착한 문제아’. 학교 숙제나 노트필기 한번 제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수업은 귓전에 들리지도 않았다. 대신 공부시간에도 혼자 히죽거리며 웃거나 방과후엔 혼자 공동묘지에서 놀기를 좋아하고 틈만 나면 ‘나는 어디서 왔나’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던 과조숙한 소년. 명상이란 것도 워낙 골똘한 생각을 오래 하다보니 절로 터득한 사색법에 불과했다.

“도시에서 살았다면 정말 정신병원이라도 가봐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였어요. 실제론 아무 것도 없는데 제 눈과 귀엔 항상 이상한 광경이나 무슨 소리가 들렸거든요. 예를 들면 전쟁영화처럼 누군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나 비명을 지르는 소리, 산길을 걷다보면 갑자기 눈 앞에 큰 기와집과 호랑이 같은게 보인다거나. 아주 심했죠.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얘기를 하진 않았어요.

해봐야 아무도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 공부라곤 한자도 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어른들 말씀은 잘 듣고. 다들 이상하게 봤죠. 교육자였던 아버님도 ‘이제까지 별별 제자들 다 키워봤어도 너같은 아이는 정말 처음 본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환청이나 환시에 심하게 시달리면서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걸까, 나는 왜 이럴까, 어디에서 왔을까, 심지어 내가 왜 이씨인가…, 그런 생각들뿐이었어요.”

학창시절 이미 유체이탈까지도 경험했던 상태. 중학교땐 태권도를 시작하면서 환청과 환시에서 잠시 벗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도 운동할 때뿐. 고교졸업후엔 재수를 한답시고 3년간 어영부영 놀았다. 그러던 중 어느날인가 낮잠을 자다가 흰 호랑이가 달려드는 꿈을 꾼 뒤 신기하게도 잡념의 상당부분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겨우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중학교 기초조차 없는 밑바닥 실력으로 이를 악문채 6개월간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 영어는 아예 중학교용 영어단어장을 통째로 외는 등 그나마 악착같은 시험준비로 1972년 서울보건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병리학. 낮에는 체육관을 운영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며 2년간 착실히 공부했다.

그후 체육의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단국대학교 체육과에 편입, 대학졸업후엔 한강성심병원을 비롯해 약 10년간 여러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그의 삶을 통틀어 가장 모범적인 시기였다.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동생 학비도 대주면서 생전 처음 부모님께 정상적인 자식 노릇을 해보았다.


이 시대에 태어나 잠시 거쳐가는 나

“그러다가 또다시 회의가 드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서 뭐하나’ 싶고, 결국 병원에 사표를 내고 혼자 모악산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제가 품어왔던 그 많은 물음의 답을 비로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깨달음은, 내 몸은 내가 아니라 ‘내꺼’라는 거. 내 마음도 정신도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일뿐이란 거죠.

나의 존재는 이전에도 있었고, 다만 이 시대에 태어나 잠시 지금을 거쳐가는 것인데 그럼 왜 나는 지금 이 세상에 보내져야하는 걸까, 내가 해야 할 일과 사명도 깨닫게 됐구요. 그런데 나중에 천부경을 읽어보니까 그때 제가 깨달은 모든 내용이 이미 4,000년전 단군의 천부경안에 다 나와있더라구요. 단군의 홍익인간정신을 담은 단학은 그렇게 해서 시작이 된 겁니다.”

모악산에서 나온 뒤 새벽마다 운동하러 다니던 안양 충현탑 공원에서 우연히 한 중풍환자를 만나 치료해주었다. 자신의 오랜 명상수련과 운동을 통해 터득한 나름의 독특한 기치료법이 있었다. 이 일이 소문으로 전해지면서 하나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몸이 아픈건 물론이고 알콜중독이나 성격이 급한 사람 등 하소연의 주제도 각양각색. 그렇게 불어난 사람의 숫자를 감당하기 위해 마련, 결국 오늘과 같은 숫자로까지 늘어난 단학선원이다.

그는 여타 명상가들과는 달리 전래의 명상법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까지 빌어 과학적 명상치료법을 시도했다.. 특히 ‘사회에 써먹지 않는 깨달음은 완성된 깨달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그의 ‘자동차론’에 잘 나타난다. “어떤 자동차 한 대를 갖게 됐다고 쳐요. 하지만 단지 운전면허증만 따고 차는 가만히 세워두기만 하면 아무 쓸모가 없지요. 부산이든 광주든 어디든지 목표를 정해서 부지런히 차를 움직여야 차는 더 능숙해지고 제 역할도 다 하는 거예요. 산 속에서 혼자 깨닫고나서도 막상 자신의 사명은 받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가 깨달았는지 아닌지 어찌 알 것이며 또 이 사회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어요.”


1991년 미국으로 진출

그래서 그는 세상과 가깝다. 1990년 한국인체과학연구원을 설립, 지난해엔 과학기술부 산하 재단법인으로 등록했고 1991년엔 ‘한국만으로도 땅이 좁다’며 미국으로 날아갔다. 초창기 필라델피아에서 출발한지 6년만에 전설적인 옛 인디언 성지인 아리조나주 세도나에 입성, 종합명상치료센터를 개원하며 본격적인 닻을 내렸다.

그와 교류하는 세계정신문화계의 유명인물도 다수. 몇해전 국내에도 선풍을 몰고 온 <뇌내혁명>의 저자 하루야마 시게오와 <의식혁명>의 데이비스 홉킨스, 미국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신과의 대화>를 쓴 닐도널드 월시 등과 교분이 두터우며 한때 샹송가수 나나무스쿠리도 그의 지도를 받은 바 있다.

다른 한편에선 장애물도 숱하게 건넜다. ‘종교 아닌 종교집단’‘정치 아닌 정치집단’이라는 이름은 그가 단골로 듣는 소리. 안으로 제자들의 배신도 당해봤고 밖에선 이상한 종교단체로 몰려 고발을 당한 적도 있다. 초창기 수련원을 지을 무렵엔 나환자수용소가 아니냐며 인근 주민이 투서를 하는 소동도 겪었다.

또 단군을 우상이라며 손도끼를 들고와 단군상을 부수려들던 장로와 목사 일행 등의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그럴 때 어떻게 대응하냐구요? 어떤 어려움이든 시간이 흐르면 다 오해가 풀리고 해결되게 돼 있어요. 시련이란 건 여름날 지나가는 장대비 같은 거죠. 가만히 내버려두면 저절로 풀려요. 요즘도 가끔 생각하는 것이 ‘만약 내가 가짜라면 틀림없이 나는 벌써 망했을 거다’란 거예요. 조금만 더 담력이 없었다거나 지혜가 모자라든지 의지가 약했다면 벌써 모든게 끝났을 겁니다. 어떤 시비가 생기든 제가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똥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 그렇게 왔습니다.”


“한국을 정신적 강대국으로”

스케줄도 1년전에 미리 정해지는 ‘광역인생’. 그러다보니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어려서는 중학교시절부터 하숙을 하느라 가족의 품과 멀었고, 나이 50 근처인 요즘은 심지어 같은 미국땅 안에 함께 살면서도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그리 녹록치않다.

각자 대학 동아리에서 단학사범 노릇을 하고 있는 두 아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차렷’ 한 마디면 금새 부동자세다. 간간이 ‘구경’할 수 있는 아버지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는 요즘 또하나의 UN을 만들 준비로 생각이 구만리다. 이름하여 ‘Spiritual UN’, 굳이 번역하자면 세계정신연합기구쯤 될까? 명상과 뇌의학 분야의 권위자들을 주축으로 한 세계단체로, 이원장이 대표를 맡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위상은 세계 몇위인지 몰라도 세계 제1의 정신적 강대국을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가 굳다.

그런 이원장의 눈에 요즘 새로운 경쟁상대로 떠오른 것이 맥도날드. 3년뒤를 두고봐야 할 일이다. “미국의 맥도날드 업소 숫자가 총 2만6,000개쯤 된다고 해요. 전세계에 없는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전 거기다 1만개를 더해서 3만6,000개의 연구원이나 종합치료센터같은 것을 만들려고 해요. 맥도날드가 우리의 음식문화를 바꿨듯이 정신문화도 그렇게 바꿔놓을거예요. 언제? 3년안에! 바로 지금도 진행중이지요.”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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