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6월 개최 합의

지난 6일 서울시내에서 방송사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모처에서 전화를 받더니 황급히 자리를 떴다. 기자들의 의심에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박장관의 행선지는 역시 그럴 만한 곳이었다. 잠시후 박장관은 청와대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렇지 않아도 3월부터 청와대 출입이 잦았던 박장관의 행보에 대해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지만 4월1일 김대중 대통령이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총선 이후 북한 특수’발언을 한 이후 북한과 관련된 모종의 역할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었다.


전세계이목 한반도에 집중

지난 주말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김대통령의 영종도 신공항 방문 일정이 갑자기 취소되면서 여권핵심부 주변에서 남북관계 중대발표설이 솔솔 새어나오더니 10일 오전 급기야 남북정상회담 성사라는 메가톤급 뉴스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기자회견이 있은 통일부는 취재기자들로 시장바닥을 방불케했고 외신들은 ‘어전트’(긴급뉴스)로 이 소식을 타전하는 등 전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집중됐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 등에 대해서는 당국자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지만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는 것 자체가 분단 55년사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리라는데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박정희 정부를 비롯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상회담을 극비리에 추진했지만 모두 비사(秘史)에 머물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남북이 공식 발표함으로써 현실로 다가왔다. 분단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됨으로써 남북간 상호불신과 뿌리깊은 적대감이 해소되고 21세기 한반도 주변에 실질적인 화해와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평이다.

6월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우선 총선 이후 남북에서 실무자 각 3, 4명이 모여 구체적인 의제를 협의하겠지만 그동안 북한의 정부간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절름발이’형태로 진행돼온 경제협력과 1,000만 이산가족의 상봉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전망이다.

정부가 정상회담을 발표하면서 “지난 반세기동안 남과 북이 단결과 폐쇄의 지속으로 남북주민 간에는 자유로운 왕래는 커녕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지적한 점은 이런 측면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 개최는 주변국을 통한 간접접촉에서 벗어나 남북의 최고 정책결정자가 직접 자리를 함께 한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한반도문제 해결의 주체가 남북 당사자라는 점을 각인시킴으로써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김 대통령의 포괄적 접근방식에 한층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억제시키면서 한반도에 평화공존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데 성공할 경우,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지도력을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 회담수락 의도에 촉각

그러나 일각에서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치가 급상승하는데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우선 강릉 잠수정 침투를 비롯해 연평해전과 일방적인 서해 북방한계선(NLL)무효선언 등 국민의 정부이후에도 긴장구도를 늦추지 않은 북한이 협상개시 보름만에 갑작스럽게 정상회담을 받아들인 배경이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도 “북한측이 몇가지 요구를 해왔으나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협상이 장기화할 것으로 생각했다”며 “대통령이 연말쯤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언급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 주변에서는 곧 닥쳐올 농사철을 맞아 비료 지원 등 북한측에 급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긴장과 갈등의 역사가 50여년간 지속돼온 남북관계는 최고 지도자의 정상회담으로도 풀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받아들인 만큼 의제나 절차 논의과정에서 예상되는 난점은 쉽게 해결될 수 있겠지만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 개발 등 군비축소와 통일방안 등은 남북의 권력관계는 물론 주변국의 이해관계까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대목이다. 독일의 통일과정에서도 동·서독의 내부 문제해결보다는 당시 소련 및 미국과 협상이 더욱 어려웠던 것도 이같이 복잡한 국제사회의 역학관계 때문이다.

북한측이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를 피하고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과 회담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 4개 요구사항을 줄기차게 요구할 경우 정상회담은 ‘만났다는 것’외에 구체적인 성과없이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정부와 학계의 대북전문가들은 많은 변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일단 정상회담을 수용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단 정상간 만남을 받아들인 이상 북한도 회담실패에 대한 부담을 떠안기 때문에 어느정도 가시적 성과를 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경협·이산가족문제 진일보에 기대

북한내 군부 등 복잡한 권력관계까지 감안한다면 결국 양 정상은 통일방안 등 골치아픈 현안에 대해서는 7·4 남북공동에서 천명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재확인하는 선에서 절충하는 한편 경제협력과 이산가족교류분야에서 눈에 띄는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첫 만남의 성적표를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남북정상 회담 개최는 점철된 남북관계의 암울한 역사를 청산하고 21세기 통일의 초석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여야가 치열하게 맞붙은 4·13총선을 불과 3일 앞두고 발표된 것이 ‘옥의 티’라는 지적이다.



남북합의서 전문

“남과 북은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금년 2000년 6월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 방문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쌍방은 가까운 4월 중에 절차문제 협의를 위한 준비접촉을 갖기로 하였다.

상부의 뜻을 받들어 남측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 상부의 뜻을 받들어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 2000년 4월 8일.”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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