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7일은 21세기 들어 처음 맞는 ‘신문의 날’이다. 44회째 맞는 이날의 표어는 ‘펄친 신문, 열린 미래’다.

그러나 신문의 미래는 밝은 것 같지 않다. 기자협회가 국장급 이하 기자 200명을 상대로 조사한 신문의 사회적 위상도는 ‘열린 미래’가 아니다. 미래 신문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 ‘지금보다 낮아질 것’(48.8%)이라는 비관론이 ‘지금보다 높아질 것’(12.1%)이라는 낙관론을 압도했다. 기자직을 떠나기를 은근히 바라는 숫자는 74.7%로‘이직할 마음이 없다’의 24.9%을 앞섰다.

왜 이런 비관론이 기자 사회에 만연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통일로변 문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세워져 있는 ‘순국 종군기자 추념비’의 비문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 요즈음 기자들을 꾸짓고 있는듯 하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인류의 자유가 위협당했을 때 유엔군 용사와 더불어 필탄을 퍼붓다 젊음을 이 땅에 바친 여러나라 펜의 기수 18명. ‘먹물’은 사라져도 기자의 얼은 푸르다. 그 영광의 희생, 길이 정의를 밝히니….”

AP통신 홍콩특파원으로 있다가 6·25가 나자 대전 방어전을 취재한 윌리엄 무어의 죽음은 ‘기자의 푸른 얼’을 보여준다. 무어는 1937년 AP에 입사해 2차대전에 소령으로 참전했다. 1949년 재입사해 1950년 2월 서울지국장을 지냈다. 대전이 함락되자 미 제24단장 딘소장이 실종된 사실을 특종보도했다.

무어는 7월30일에 진주전선에서 부상한 미군 전차대원을 돕다가 인민군의 포탄에 맞아 숨졌다. 그때 나이는 40세. 그의 순직을 목격한 전차대원 얜더슨 하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진주를 빠져나와 마산 부근 6.5km 지점까지 왔을 때 다리가 파괴되어 전차가 건너지 못하게 됐다. 우리는 중위 한사람 등 몇몇의 부상자와 함께 있었다. 무어 특파원은 중위를 들 것으로 나르는 것을 돕고 있었다. 우리 9명은 다리 밑에 있었는데 하오 2시~4시 사이 적의 박격포와 수류탄 공격을 받았고 그는 시체가 되어 물위에 떠올랐다.”

미국 NBC TV의 앵커 톰 브로커의 ‘나이트 뉴스’는 지난해 5월부터 ‘용감한 이들의 고향-한국’, ‘잊혀진 전쟁’을 특별보도물로 수시방영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관련있는 재향군인, 종군기자, 민간인의 경험담과 가족찾기, 전우찾기 등이 그 내용이다. 지난해 9월15일 방영된 쌍둥이 종군기자 진과 차리 존스의 ‘기자들이 목숨을 걸 때’는 감동적이었다. “먹물은 사라져도 기자의 얼은 푸르다”는 상징, 그대로다.

2차대전 때 해병대의 사진사였던 두 형제는 TV 카메라를 멘 최초의 종군기자였다. 또한 그들은 싸우는 현장을 찍어야 했기에 형은 아우가 촬영을 할 때 총을 들고 그를 보호했고 적군이 접근하면 이를 알려주었다. 특히 동생인 찰리는 한 손에 권총, 한 손에 무비카메라를 들고 전투가 심해지면 곧잘 카메라를 팽개치고 전투요원이 됐다.

여기자로써 한국전쟁의 시초부터 취재한 해럴드 트리분의 유명한 종군기자 매거리트 히긴스와 차리와의 만남은 우연 이상이다.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한 두 형제는 6주일 뒤에 전선에서 38마일 떨어진 적진에 낙하해 군대와 함께 포로 구출작전을 벌였다.

이때 찰리는 군인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해 적을 쏘아댔다. 이를 취재하던 히긴스 특파원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격려했다. “내가 여지껏 본 전투중 가장 멋진 전투였오. 꼭 훈장을 타도록 해주겠소. 찰리는 그녀를 쳐다보며 ‘부인, 나는 종군기잡니다’라고 말한 후 곧바로 또 적을 쏘기 시작했다.

쌍둥이 형제가 찍힌 사진에는 모두가 철모에 무장한 모습이다. 군인인지 기자인지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1985년 동생 찰리가 병사할 때까지 TV 기자로 일했다. 그들은 총을 들어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이나 펜을 들어 ‘먹물 필탄’을 쏘는 것이나 똑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취재에 앞서 경험이 없어 죽음에 직면한 신병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인간으로써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기자의 푸른 얼이요, 열려진 미래라고 생각했기에 생명을 건 위험에도 목숨을 던졌다. 기자직을 떠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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