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낭주골)의 산천과 마을엔 고대로부터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어느 계절,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다소 거칠어 보이긴 하지만 유현한 자태를 하고 있는 남도의 보고싶은 얼굴 월출산, 지금은 영산강 하구언의 완공으로 거대한 호수가 된 영산호, 드넓은 나주벌.

필자가 처음으로 영암이란 지며을 알게 된 것은 솔직히 말해서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1970년대 월출산의 절경과 영암이 지나가버린 시긴의 흔적을 노래말에 담아 그윽한 남도의 향수를 자아내게 했던 하춘화의 '영암아리랑' 과 이미자의 '낭주골 처녀' 를 통해서였다.

대중가요가 때로는 그 어떠한 시보다 위대할 때가 있다. 강력한 문화적 메시지를 빠른 속도로 대중의 정서 속으로 전파시키기 때문이다. 영암은 영산강 물길따라 유구한 역사의 푸른 향기르르 자랑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와 마한,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일본의 아스카문화의 원조가 된 백제의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도항할 때배를 탔던 상대포는 중국과 일본과의 고대 문물들을 교역한 국제 무역항구로서 역할을 다하면서 영암차도 문화의 번영을 구가했다.

월출산을 중심으로 하여 차나무가 자생한 연대는 천년의 세월을 헤아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차나무 역사를 놓고 인도나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설과 우리나라 자생설이 있다.

수입설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가야의 김수로 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올 때 차씨를 가져와 심었다는 것'과 '삼국사기의 신라 홍덕왕때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씨를 가져와 심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반대로 중국에 차씨를 가져가 심은 사실도 있다. 서기 8세기 신라 왕가의 몸을 빌려 '지장왕보살'로 현신한 신라왕자 김교각이 당나라로 건너가 구화산에 입산하여 뼈를 깎는 고행을 할 때 신라에서 가지고 간 차씨로 구화산 일대에 다원을 조성해싸. 당시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 직후, 전쟁이 참화로 민중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김 지장왕보살은 자신이 직접 조성하고 제다한 김지차의 보급을 통하여 특별히 아무 것에더 집착할 수 없는 당나라 민중의 영혼의 세계를 어루만져주었다.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은 1992년 한국 최초로 중국 안휘성에 있는 구화산의 김 지장왕보살 성지를 답사한 박태근 교수와 박정수 일간스포츠 사업, 판매본부장(당시 사회부장)에 의해 밝혀졌다. 이는 우리나라 차나무의 자생설을 뒷받침하는 획기적인 차유적지 발견이었다.

월출산 일대에 차유적지가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월출산 일대에 차나무가 자랄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차를 선의 한 과정이라 생각한 선종의 사찰이 신라말 월출산을 중심으로 많이 창건된 역사적인 환경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도갑사, 운흥사, 불회사. 무위사 등이 오늘날까지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 차를 마시려면 필수적으로 찻그릇이 있어야 한다. 신라 말 선종의 대유행은 우리나라 안에서 새로운 찻그릇 문화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위치한 신라말(8세기~10세기) 유약을 입힌 도기를 제작한 대규모 가마터는 최초의 남도 찻그릇 문화를 탄생시켰다는 차원에서 새롭게 연구되여야 할 귀중한 문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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