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외면, 전근대적 경영방식이 위기 불러

“터질 게 터졌다.”

4월26일 가뜩이나 외줄타기를 하던 주식시장이 외국인의 현대주 내다팔기로 휘청거리자 금융권에서는 이같은 말이 나돌았다.

투신권 공적자금 지원대상에서 현대투신이 제외됐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현대투신의 대주주인 현대전자와 현대증권 현대상선 등의 경영악화를 우려한 외국인이 주식을 대거 내놓았고, 이것이 현대그룹 전체과 다른 기업의 주식으로 확산된 것이다.


경영지표만 건실한‘외화내빈’

현대그룹 주식은 3일만에 반등했지만 이번 사태가 단순히 현대의 유동성 부족 가능성을 계산한 투자자의 ‘산술게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공통된 시각이다.

오히려 IMF 위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보여준 현대의 행보에 신뢰를 잃어버린 국내외 투자자의 심리가 확인됐다는 것이다. 모 증권회사 전략투자 담당자는 “현대는 작년 한해 기아차 인수 등으로 ‘몸집 불리기’에만 치중했지 구조조정이라는 시장의 요구를 외면해 투자자의 반감을 사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가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이같은 사태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고 자칫 우리 경제 전체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의 표면상 경영지표를 살펴보면 그런대로 건실한 기업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춰보면 ‘현대쇼크’가 단순한 해프닝만은 아니라는 우려를 낳게 한다.

현대측의 공식자료에 따르면 전체 부채는 지난해 말 52조5,773억원으로 전년도 61조5,039억원보다 8조9,000억원 가량이 줄어들었다. 부채비율도 449%에서 181%로 낮아져 정부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그렇지만 현대의 부채는 여전히 4개 그룹중 가장 많으며 LG그룹과 비교해도 매출액은 1.5배지만 부채 규모는 2배에 이른다. 지난해 부채축소 규모도 8조9,000억원으로 LG의 10조1,000억원보다도 적었다.

현대의 부채가 줄어든 것도 현대정유 현대산업개발 등이 계열에서 분리되면서 자동적으로 줄어든 부채까지 계산된 것이어서 실질적인 부채감축은 미미했다는 분석이다. 사실 정부와 재계가 지난해 말까지 부채 규모를 200% 이내로 줄이기로 합의한 이후 현대가 과연 이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가장 관심이 쏠렸다.


굴뚝산업 치중, 미래가치 불투명

매출이나 순이익 대비 부채규모 뿐만 아니라 현대의 주력기업이 자동차 중공업 상선 등 ‘굴뚝 산업’에 치중돼 있어 미래가치가 불투명하다는 점도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특히 자동차와 그룹 차원에서 밀고 있는 대북사업도 국내외 상황변화로 섣부른 전망이 어려운 실정이다.

현대자동차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지난해 국내시장의 76%를 점유하게 됐고 지난해 순이익도 현대자동차 4,143억원, 기아자동차 1,357억원 등 모두 5,500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최근 르노가 삼성자동차 인수에 성공하고 대우자동차의 해외매각도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국내 자동차시장은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게 돌아가고 있다. 르노의 한국시장 진출은 현대자동차에 가장 큰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게 자동차업계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르노는 2002년 준중형차 SM3, 2003년 레저용차 SM6 등 신차를 잇따라 내놓아 한국시장 점유율을 10%까지 올리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는 사실상 한국시장 판매 1위인 현대자동차를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물론 현대자동차측도 손을 놓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자동차는 자체 경쟁력 향상과 함께 다음달 말까지는 해외업체와 전략적 제휴를 맺어 외국업체의 공략에 대응할 방침이다.

그러나 국내시장에서 어느 정도 영토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인데다 해외시장도 메이저들의 잇딴 인수합병으로 국내업체의 공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대북사업 지지부진, 전자 부채도 큰 부담

매년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는 대북사업의 향방도 관심거리다. 현대측은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지난해 10월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서해안공단 조성 등 굵직굵직한 대북사업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8년 6월 1차 방북때도 거창한 청사진을 내놓았었는데도 눈에 띄는 진전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투자자의 반응은 아직 적극적이지 않은 실정이다.

또 공단조성 등에 투입되는 엄청난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도 확실치 않다는 지적이다

. 금강산 관광을 주도하고 있는 현대상선의 매출은 4조8,365억원으로 부채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다. 현대측은 “금강산 관광사업의 경우 당초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내년에는 손익분기점을 넘게 된다”며 “북한이 사회주의라는 특수한 상황이지만 투자가치는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오는 6월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에서 대북지원 사업의 방향이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따라 현대의 대북사업도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룹 주력사로 등장한 현대전자의 경우 반도체 호황으로 1분기 14억9,000만달러의 수출실적을 보여 지난해에 비해 131%의 높은 신장율을 나타냈으며 올해 경상이익만 1조원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부채가 9조3,000억원이나 돼 금리가 엄청난 부담이고 현대투신의 대주주로 발목이 붙잡혀 있는 상태다.

현대는 1998년에는 적자를 냈지만 지난해에는 2조원 안팎의 이익을 냈다. 물론 10대 재벌중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이고 지난해 경기회복 등에 힘입은 부분이 크지만 현대그룹 주력사나 계열사의 영업실적 등을 감안할 때 대우그룹처럼 당장 유동성 위기를 겪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동의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외환은행측도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설은 전혀 근거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구조조정 실천의지 보여야

이번 ‘현대 쇼크’가 유동성 우려에서 시작됐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현대그룹의 전근대적인 경영방식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거의 혼자 걸을 수도 없는 총수와 그 뒤를 이어받으려는 자식간의 추잡한 싸움으로 아직도 ‘황제경영’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국내외에 확연히 박혔으며 경영 투명성도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 정훈 교수는 “현대는 매출액으로 우리나라 최고기업이고 부채비율도 200% 이내로 줄였다지만 불투명한 지배구조때문에 시장에서 별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현대측은 구조조정 일정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지자 올해 안에 10개사를 계열분리하거나 청산·합병 등을 통해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현대 구조조정위원회 관계자는 “계열사 정리가 끝나면 부채비율이 181%에서 174%로 떨어지고 올해 전체 순이익도 5조원대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동안 현대의 약속위반을 수차례 지켜본 상당수 투자자들은 무엇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리젠트자산운용 이원기 사장은 “현대가 스스로 구조조정 노력을 외면해 시장의 불신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며 “지금이라고 구조조정 스케줄을 명확히 하고 이를 실천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04 17:29


송용회 주간한국부 songy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