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 지지부진, 국세청 앞세워 고강도 압박

`표'를 의식해 극도로 행동을 자제하던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 등 ‘경제 사정기관’이 4·13 총선 이후 아주 노골적이고 거칠게 재벌을 몰아세우고 있다.

지난 4월18일 공정거래위의 청와대 업무보고때 김대중 대통령이 “무슨 일이 있어도 연내에 재벌개혁을 끝내라”고 지시한 이후 경제 사정기관들은 충성경쟁이라도하듯 다투어 재벌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이유는 재벌의 저항과 속임수 때문에 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것이다.

현정부 집권이후 2년간 그토록 개혁에 몰두했음에도 총수 1인 중심의 `황제경영'은 여전하다. 금융계열사를 사금고로 이용하고 있고 계열사간 부당 내부거래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현대그룹의 몽구·몽헌 형제 사이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졌던 이른바 `왕자의 난'은 재벌개혁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정부가 격노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로 인해 현대에 대해서는 부실 덩어리인 현대투신에 돈을 넣어 살려주는 댓가로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일선 퇴진과 총수 일가의 사재출연을 포함한 고강도 자구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총선 이후의 재벌개혁 드라이브에는 국세청이 가세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동안은 주로 금감위와 공정위가 `행동대원'으로 동원됐으나 재벌 길들이기에 한계가 있다고 정부가 판단한 때문일까.

예나 지금이나 ‘재벌 때리기’에는 역시 세무조사가 약발이 가장 확실하다. 공정위가 조사에 나서봤자 기껏해야 몇 백억의 과징금 부과가 고작이지만 국세청이 한 번 칼을 뽑으면 몇 천억원의 세금 추징에, 마음만 먹으면 재벌 오너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도 식은 죽먹기다. 공정위나 금감위의 `엄포'엔 눈도 깜짝않던 재벌들이 국세청이 나서자 숨을 죽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부, 4대재벌 주식이동 조사

국세청은 지난달 24일부터 4대 재벌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와 함께 주식이동 조사를 벌이고 있다. 공정거래위는 30대 재벌에 대한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5월부터 시작했으며 금융감독위는 6월부터 재벌 금융계열사에 대해 특검을 시작한다.

여기에 이헌재 재경장관과 이용근 금감위원장, 이기호 경제수석은 입만 열면 과거 황제경영의 산실이었던 비서실 역할을 하고 있는 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국세청은 현대, 삼성, LG 등 재벌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와 주식이동 조사에서 지난 10년간의 주식 이동상황을 분석, 변칙증여 또는 상속혐의가 있을 경우 세금을 추징키로 했다. 특히 2세로의 승계 과정의 탈세여부를 집중 규명하기로 했다.

지난 수년간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신종 금융상품 출시가 러시를 이루면서 세법에서 정한 평가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고·저가 양도를 통해 세금없는 부의 이전이 이뤄진 사례가 있는지도 파헤치기로 했다.

사실 그동안 재벌들은 주식이동을 통해 자본이득이나 부를 2세에게 사전상속하거나 경영권을 이전하면서도 정상적인 조세부담을 회피한 사례가 많았다.

공정거래위는 30대 재벌에 대한 부당내부거래 조사에서 특히 금융계열사를 통한 내부 자금지원 여부를 철저하게 규명하기로 했다. 금융계열사의 사금고화를 뿌리뽑겠다는 의지다. 금감위가 6월부터 시작하는 재벌 금융계열사 특검도 자기계열사 부당지원 여부와 고객 재산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재벌오너 영향력 최소화 노려

경영·지배구조 개선을 압박해 재벌개혁의 종착역인 황제경영을 끝장내자는 것이 1차적인 목표다. 정부는 그동안의 개혁으로 부채비율을 200%대로 축소하고 계열사 정리를 통해 문어발식 경영 행태는 개선했지만 재벌 오너의 반발로 경영·지배구조 개선에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외이사·감사제도 도입, 소액주주권 강화, 이사회와 주총을 통한 의사결정 의무화 등으로 총수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한 법·제도적 장치는 갖춰놨으나 계열사를 통한 순환출자로 5% 미만의 지분을 갖고서도 50% 이상의 지분력을 행사하면서 그룹을 떡주무르듯하는 황제경영의 행태는 뿌리뽑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재벌 오너들이 지분만큼만 권한을 행사하며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맞겨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경영·지배구조를 뜯어고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재벌들은 귀를 막고 있다.

올해만 넘기면 대통령 선거가 2년 앞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정부의 힘이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그동안의 경험칙을 통해 터득하고 있다. 정부가 다급하게 개혁을 압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재벌의 발을 묶어두자는 의도도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에 비해 현저하게 친재벌적이다.

따라서 재벌들의 시선이 힘있는 야당쪽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재벌과 거대야당이 힘을 합치면 개혁의 지속이 어려워짐은 물론 돈이 한쪽으로 쏠릴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당의 대선 전략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정치는 돈’인데 돈은 재벌이 움겨쥐고 있다. 따라서 정부 입장에서 아직은 재벌을 마음대로 놀도록 풀어놓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정부 압박에 정면으로 반발

재계는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으로 황제경영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말을 아끼며 근신하는 자세를 취하는듯 했으나 4월20일 ‘골프장 데모’를 통해 정부의 몰아치기식 개혁 압박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 전경련 회장단의 골프회동후 손병부 부회장은 지배구조 문제에 대해 “이미 기업의 지배구조와 관련한 많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기때문에 더이상의 정부 간섭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기존 지배구조를 계속 유지하는게 낫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정부의 구조조정본부 폐지 요구에 대해서도 구조조정본부의 역할과 기능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월권 행위’를 운운하는 일은 무의미하며 어차피 기업 전략과 인력문제를 관할해야 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기업활동에 장애가 되고 있는 30대 그룹 지정제도에 대해서도 축소지정하거나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손 부회장의 이같은 발언이 있은 뒤 정부의 공세수위가 높아지는 등 정·재계의 대결양상이 증폭되자 재계는 다시 몸을 낮추고 있으나 시간이 갈수록, 차기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재계의 조직적 저항과 반발은 거세질 것이다.

경제 사정기관을 통한 전방위 압박과 이에 대한 재벌의 반발이 주식시장에 좋지않은 영향을 미치자 이헌재 재경부장관은 재계단체장과의 회동에서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주식이동조사는 정기조사로 일상적인 것이며 다른 의도는 없다”고 다독거렸지만 재계는 이를 믿지 않고 있다.

김종현 연합뉴스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0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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