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권과 재벌개혁

김대중 정권의 재벌개혁은 재벌 회장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지난 1998년 1월13일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재계 총수들을 만나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에 합의했다.

이때 합의한 5대 원칙은 정권출범 3년째를 맞은 지금도 ‘재벌개혁의 바이블’로 통하고 있다.

경영투명성 제고를 비롯, ▲재무구조 개선 ▲지배주주 및 경영진 책임강화 ▲핵심기업 설정 ▲상호채무보증 해소 등이 5대 핵심원칙이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줄기차게 재벌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5대 원칙의 이행을 점검하고 독려했다.

이런 모임 가운데 1998년 7월26일 1차 정·재계 간담회에서 5대 그룹이 자율적으로 조기에 빅딜을 합의한 것은 재벌구도를 바꾸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LG는 우여곡절 끝에 반도체사업을 현대에 넘겨줘야 했다. 철도차량 정유 석유화학 항공기 정유 등 나머지 업종에서도 빅딜이 진행돼 일부는 주인이 바뀌었다.


재벌 향해 칼 뽑은 DJ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해 8·15 경축사를 통해 재벌개혁의 완수를 다짐하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토해냈다.

“이제는 시장이 재벌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라고 그는 역설했다. 당시는 대우사태로 인해 금융시장 불안이 심화되는 상황이라 김대통령의 발언은 일파만파를 불러왔다. 재벌해체를 향해 칼날이 조여오고 있다며 재벌이 바짝 엎드렸다.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막아야 재벌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새롭게 강조했다.

기존의 5대 재벌개혁과제에 포함되지 않았던 항목이다. 이에 따라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에 ▲순환출자 억제 ▲내부거래 억제 ▲편법상속·증여 차단 등이 더해져 재벌개혁 ‘5+3 원칙’으로 강화됐다. 특히 김대통령의 8·15 발언중에서 ‘재벌개혁’을 일부에서 ‘재벌해체’로 해석하면서 정치권과 재계는 연일 뜨거운 논란에 빠졌다.

청와대는 파문이 확산되자 연일 “재벌해체가 아니다”라며 긴급히 진화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의 김태동 위원장과 이 위원회 위원인 황태연 동국대교수가 강도높은 재벌비판을 하면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않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김대통령은 보름여뒤인 1999년 9월4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비장한 각오로 재벌개혁문제를 다시 언급했다.

“내 평생에 이렇게 힘들었던 일이 없었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재벌개혁이 불가피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재벌개혁을 강력히 추진해야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재벌개혁은 국민 전체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재벌이 손해보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실제로 금리와 물가가 안정되고 주식값이 올라 기업의 이익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요즘 주가를 생각하면 그의 발언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대통령은 “재벌개혁과 중산층, 서민대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100년전 우리 민족이 좌절했던 것처럼 21세기를 맞아 다시 좌절을 경험할 것”이라며 “국정을 맡은 모든 사람은 굳은 결심으로 이같은 도전을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마치 칼을 차고 재벌과의 전쟁에 나가는 장수의 출사표와 같다.


현정권 3년, 재벌 지각변동

김 대통령 재벌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는 ‘DJ노믹스’ 자문그룹 멤버중 상당수는 재벌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감을 여전히 갖고 있다.

이들은 재벌이 정부의 개혁정책에 저항하는데 그치지 않고 반격을 가하고 있으며, 반개혁 움직임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재벌체제는 권위주의시대의 마지막 유산으로 해소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재벌관이 DJ에게 그대로 학습되어 올들어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유도정책과 총선이후 세무조사와 같은 재벌개혁 강공 드라이브를 몰고왔다고 볼 수 있다.

여당의 재벌해체 정책에 대해 야당인 한나라당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반한다며 줄기차게 반격을 가하고 있다. 이회창 한나라당총재는 지난해 9월 “뚜렷한 대안제시도 없이 재벌을 사실상 해체하려는 접근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에 반하는 것”이라며 “도대체 김대중 경제의 본질은 무엇이냐”라며 ‘경제 색깔논쟁’을 지폈다.

그렇다면 현정권의 재벌개혁 3년의 실적은 어떤가. 재벌에겐 일대 대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세계경영’의 우상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와 같은 ‘DJ정권 발행 재벌지도’는 재벌개혁의 결과를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1998년 6월 독자적인 생존가능성이 없는 55개 기업이 퇴출되면서부터 동아건설, 고합, 거평, 쌍용건설 등 16개 계열의 38개 대기업 등 모두 72개 기업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전경련은 지난해 말 “구조조정이 일단락했다”는 자료를 냈다. 57개 주채무계열 그룹 대부분이 온갖 시련을 딛고 채권단과 맺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4대 그룹의 부채비율은 200% 미만으로 뚝 떨어져 재무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됐다는 점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재벌들은 주장했다.

재벌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DJ노믹스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기본철학으로 삼고 있다.

“시장경제의 근간이 되는 자유경쟁 책임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기도 하다. 때문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병행발전하는 속성이 있고 함께 발전해야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현정권의 경제관료들은 중남미 국가들과 아시아 각국이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경제발전만을 추구한 결과 사회적 실패와 경제위기를 맞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DJ·재벌 싸움 제2막 올라

또하나의 키워드는 질서자유주의(Order Liberalism)다.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학파를 중심으로 발전된 이론이다.

정경유착으로 인해 모든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이 한곳으로 집중되면서 결국 나치정권이 탄생하게 됐다고 분석하는 이론이다. 독일제국의 자유방임적 경제체제 때문에 기업들은 독과점을 유지하고 담합조직과 각종 이익단체를 결성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정치권력과 유착됐다는 것.

전경련은 그러나 재벌의 소유집중 규제에 대해 “사회적 마찰 없이 재벌의 소유를 분산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대이전”이라며 “세대이전을 통해 부가 분산되도록 세제를 개선하고 상속세 회피를 방지할 수 있는 항구적인 대처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경제관료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를 걸어나올 때까지 재벌개혁을 지속적으로 펼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재벌들은 DJ가 총선이후 레임덕에 빠져 강경일변도의 재벌개혁 정책을 누그러뜨리길 기대하고 있다.

칼자루를 쥔 DJ와 반격을 노리는 재벌간의 싸움 제2막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

정구학 한국경제신문 산업부기자

입력시간 2000/05/0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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