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멀었다. 서울에서 한나절이나 걸리는 길을 달려 망호리쯤에 이르자 마을 초입에서 만난 한 노인이 앙상한 팔을 들어 마을 안쪽을 가리켰다. “이리 쭉 가다가 빨간 기와를 얹은 집이 나오면 그 집이 그 집이여.”

그렇게 만난, 빨간 지붕을 얹고 사는 집 주인 이식우(64)씨는 요샛말로 참 ‘썰렁한 어른’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어찌된 일인지 물으면 물을수록 더 물을게 없어졌다.

물론 성의가 없어서는 아니다. 정성껏 얘기하는 건 틀림없는데 도무지 그의 ‘말발’이라는게 원래가 그렇고 그렇다. 남들처럼 생색낼 줄도 모를 뿐더러 자기 PR은 멍석을 깔아줘도 못한다.

그와의 대화중 몇마디. 근처의 동네 사람이 다 만드는 참빗인데 왜 유독 ‘이씨 것’이 유명하냐고 물어보자 “사실 다를 것도 없어요.

그저 내가 남보다 꾸준히 했다면 그거나 다를까….” 순박하고 인정스럽기로 치자면 부인 전수남(62)씨도 이씨만 못하지 않지만 그래도 ‘출제자의 의도’를 짚는덴 이씨보다 몇수 위다. “실은, 그래도 이 집 남자들이 특히 솜씨가 뛰어나대요. 9대째 내려오는데 그중에도 최상품이지요.”


쪼개고 다듬고...부창부수 수십년

말수가 적다보니 허튼 말을 할 빈도도 낮다. 이씨는 이미 동네에서도 ‘점잖은 양반’으로 공인돼 있다.

그러나 순수하기가 이를데 없는 이 무골호인을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 그는 유명 사찰 안에서나 봄직한, 철제로 된 문화재 지정 안내문이 대문 앞에 세워진 전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15호, 인간문화재 참빗장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도 않는다. 요즘같이 월출산 봄볕이 아무리 기막힌 때라도 눈길 한번 주는 일이 없다. 그저 대나무 껍질이며 살을 쪼개는 일로 하루해가 다 저문다. 그 옆엔 부인 전씨가 있다.

대나무를 가늘고 매끈하게 다듬는 기초작업은 부인이 맡고, 본작업은 남편 이씨가 일사불란하게 나눠 진행한다. 수십년의 부창부수와 더불어 남편 손엔 깊은 옹이가 박혔고 부인의 손마디엔 붕대가 감겨있다.

대나무 살에 손을 많이 베어본 뒤 나온 처방이다. 남편 못지않게 분주히 대나무쪽을 깎아내던 전씨가 농담도 한마디 던진다. “글쎄, 인간문화재는 내가 진짜 인간문화잰데, 왜 이 냥반 이름만 올라가 있대요?”

부창부수로 만들어내는 이 참빗은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전통공예품이다. 여간해선 외출도 하지 않고 둘이서 합심해 만들면 작은 건 하루 30개, 좀 큰 빗은 5개까지 만든다. 농사도 짓긴 하지만 이씨에겐 부업의 개념이다. 지난해도 수해로 벼농사 대부분을 망치는 등 갈수록 어려워지는게 농사이지만 어쨌거나 하늘을 쳐다보며 가슴 졸이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손을 믿고 사는게 훨씬 속 편하다.


스무번의 공정과 200여번의 손질

“가장 어렵다거나 조심해야 하는 단계가 따로 없어요. 죄다 어려워!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중 단 한가지만 잘못돼도 그 빗은 못 쓰고 버려야되거든요.”

참빗 하나를 만드는데 약 스무번의 공정과 200여번의 손질을 거쳐야한다. 똑같은 재료, 똑같은 시간을 들여 만들고도 누구 손에선 1,000원짜리 상품이 나오고, 누구 손에선 700원짜리 하품이 나오는게 세상이치다.

그것이 솜씨의 차이다. 본디 참빗 만드는 곳이야 단양 등 다른 지역도 없지 않지만 그중에도 이씨가 있는 영암에서 나온 참빗은 300년전 궁중의 진상품으로 올려질 만큼 특히 이름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문화재 이씨의 참빗은 3,000원이 됐든 4,000원이 됐든 동종 상품중엔 최고의 값을 받는다.

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손을 탄다. 가장 좋기로는 월출산 자락의 2-3년생 대나무를 잘라온 뒤 일일이 그 대나무의 마디를 없애고 한뼘 남짓한 크기로 토막을 낸다. 그후 60여쪽으로 잘게 나눠 속은 버리고 겉대만을 쓴다.

그것을 계속 쪼개고 쪼개 성냥개비 넓이만 해진 것 90여개를 촘촘히 명주실로 엮으면 그것이 머리를 빗는 빗살이 된다. 이것을 짙은 갈색 염료에 담가 12시간 끓여 염색을 하고는 그 양쪽 끝에 고정대를 붙이고 빗의 등허리에도 힘있는 대쪽으로 아교를 칠해 등대를 붙이고나면 비로소 빗이 완성된다.

종일 쪼그리고 앉아 그것만 들여다보자니 허리 한번 펴기가 쉽지 않은 중노동이다. 이렇게 만든 것은 광주의 상가를 비롯해 서울 민속촌과 경복궁 등 전국의 관광지 민속토산품 판매소로 팔려나간다.

지난 88올림픽때도 그랬듯이 큰 행사라도 있는 날이면 서울길도 멀다않고 달려간다. 열심히 만들긴 해도 옛날만큼 흥이 나진 않는다. 세상이 바뀌면서 이젠 참빗도 생필품이 아니라 기념품 신세가 됐고 찾는 사람도 더불어 줄었기 때문이다.

“옛날엔 염색도 사람 오줌으로 했어요. 오줌을 받아다 큰 독에 넣고 3일동안 끓이는거지요. 그래봐야 노란색이 조금 날까 말까, 색깔이 그리 잘 나오지도 않았지만. 원래 우리 할아버지는 먹감나무 참빗도 만들었는데 아버지땐 그게 끊어졌어요.

두 분은 정말 손재주가 좋으셨지. 참빗 뿐만 아니라 베틀바디든 뭐든 척척 만들어냈어요. 아버지대에서 사라진거 내가 한번 다시 이어보라구? 글쎄, 하면야 좋긴 하지만 그거 하나 만들 시간이면 작은 빗 수십개는 더 만들어요. 그러니 좀 부담스러워서….”

1986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던 무렵 학계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의 조부 이규기씨와 부친 이종일씨는 특히 손재주가 뛰어났던 참빗장들이었다. 또 그만한 전성기도 없을만큼 당신들때엔 호황을 누렸다.

선친때만 해도 참빗 100개만 만들어도 한달을 걱정없이 먹고 살 정도였다. 수입도 안정된데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잠시 손을 놓아도 누가 뭐라지 않는 자유가 좋아 큰 직장에서 부르는 것도 마다했던 부친이었다. 같은 걸 만들어도 최고품이었던데다 일제때엔 특히 수출품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말귀 알아들으면서 배우기 시작

어려서부터 이씨가 보고 배운 것도 온통 이 일이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서부터 어른들의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빗살을 실로 묶는 일 등 옆에서 잔일을 거들었고 어린 나이에 방안에 붙박혀 있는 일이 아무리 몸살나게 지겨워도 잔꾀 한번 부릴 생각도 하지 못했을 만큼 그로선 자연스레 대물림받은 가업이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딱 한번의 경험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에 눈을 돌려본 일이 없다.

35년전. 이씨 최악의 해였다. 6·25의 폐허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막 근대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무렵, 참빗으로는 너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져 그도 무작정 서울로 돈벌이를 나갔었다. 미아리 산꼭대기에 살면서 막노동도 해보고 좌판도 벌여봤지만 돈은 돈대로 못 벌고 결국 1년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힘들기로 치면 이 일도 농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농사야 그나마 해 떨어지면 쉬기라도 하겠지만 이건 툭하면 철야다.

특히 5일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그 전날밤은 부부가 꼬박 밤을 샌 뒤 이튿날 새벽 장터로 직행한 일도 많다. 거의 연중무휴 24시간 웅크려 앉아 일하는 터라 온 관절이 삐걱거린다. 병원에 가봐야 표시도 안나는 골병이다. 너무 아파 관절염 약도 먹어봤는데 이것도 장기복용하다보니 오히려 위장병을 얻었다. 한약을 먹어본들 밑빠진 독. 도무지 쉬지를 않으니 백약이 무효다. “워낙 일이 힘들어 도무지 둘 다 살이 안 쪄요.

그래도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가 먹고 사는거, 6남매 교육까지 다 해냈어요. 단지 지금도 마음에 걸리는 건 우리가 제일 힘들었을 때 그 영리한 큰 딸만은 돈이 없어 대학에도 못 보내고 상업고등학교에 보낸거, 지금까지 내내 마음이 아파요. 하필 그 아이가 때를 잘못 만난거죠.”

20년전쯤엔 따로 일꾼을 쓸만큼 한때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어쨌든 큰 영화를 보리란 기대는 이미 없다. 참빗으로 빗어내리던 삼단같은 머리 대신 파마를 한 ‘라면머리’가 유행하고 샴푸와 같은 다양한 화학세제가 등장, 머릿니가 사라지면서 참빗도 그 빛이 바랬다.

게다가 갖가지 플라스틱, 철제 빗까지 형형색색으로 쏟아져나오는 요즘이니 참빗의 수요라는 건 많아봐야 거기서 거기다. 그사이 동네 가구의 90% 가까이 같은 일을 해오던 망호리 사람도 그래서 차차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있다.


“아들중 한놈에게 물려줘야지”

9대째 맥을 끊지 않고 가업을 이은 끝에 현재 이씨에게 남은 것은 그나마 가진 땅뙈기 한뼘 없던 살림에 부인 전씨가 알뜰히 저축해 장만한 논 대여섯 마지기, 그리고 1981년 전승공예전에서 입상한 것을 비롯해 그간 20여회에 이르는 각종 대회의 수상경력이 전부다.

“싫으면 절대 못할 일이긴 하지만 사실 좀 지쳤어요. 하지만 그래도 맥은 계속 이어야 하니까. 앞으로 이 일이 더 좋아질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사람의 손으로 만든거고, 사람과 관계가 있는 거니까 뭔가 가능성이 있을것도 같아요.

큰 돈벌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여럿이 나서게 할 건 없고 우리 아이들중 하나에겐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 힘든 때에도 못 버리고 어쨌든 지금까지 이어왔듯이 앞으로 우리 아들도 꾸준히 지켜가다보면 언젠가 직장생활하는 벌이만큼 될 때가 오지 않겠어요. 그걸 바라보고 삽니다.”

이씨와의 이야기는 잠깐 중지됐다. 이야기 도중 갑자기 망호리 이장님의 ‘속보방송’이 마을 확성기를 타고 날라들었기 때문이다.

“주민 여러분! 오늘 읍내 찜질방에서 개업식을 한다니 가실 분은 차비 600원을 가지고 마을 입구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알려….” 읍내 가게의 개업식도 그날의 톱뉴스에 오르는, 아직도 오손도손한 동네.

그러나 이날도 이씨 부부는 불참이다. 차비 600원이 아니라 공짜로 차를 태워줘도 못나가게 생겼다. 바쁠 땐 농사꾼이면서 농사도 나몰라라 하는 외고집 참빗장이 그렇게 읍내까지 다녀오는 몇시간이면 그새 참빗이 몇 개인가. 더구나 이달 5월에는 지방문화재가 아니라 전국 인간문화재 자격을 가리는 심사가 기다리고 있다. 안그래도 두문불출하는 어른이 오늘이라고 흔들리랴.

입력시간 2000/05/0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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