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제1국과는 정반대였다. 네웨이핑이 태산처럼 꿈쩍도 않자 바삐 움직이던 조훈현이 지쳤는지 조급한 수가 빈발하는 것이었다. ‘혜안’(慧眼)이라고 하질 않던가. 이 판을 이기면 다음은 백을 들고 두게 되니 3:0이 될 수도 있다는 욕심이 생겨나 그 혜안이 흐려진 것이다.

바둑은 일찍 끝나가고 있었다. 정말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바둑판엔 돌이 한참 올라가 있었다. 모니터에 비친 조훈현의 얼굴이 부쩍 달아올라 있는 건 좋지 않은 징조가 아닌가. 기세가 너무 올라 있는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짝 주눅이 든 네웨이핑은 조훈현이 기회를 보아 재채기만 한번 하여도 기겁을 하여 나자빠질 것을, 조훈현은 너무 재빠른 속도로 전판을 휘어잡으려 했다. 그리고 네웨이핑은 조훈현이 흘리는 이삭을 하나둘씩 주워모으는 일만 반복한다. 악순환이었다.

현지 검토실은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열광적인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슬프게도 중국인의 축제의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2국이 얼마나 황급히 마무리가 되었나 하면 현지에서 기록을 정리하던 기록원이 제대로 두 사람의 손길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실제로 한국기원이 발행한 연감에도 ‘220수 다음 줄임’으로 돼 있다. 그 이후로 두어졌지만 기록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승부란 참으로 야박한 것이다. 사흘전 첫판을 이길 땐 천하를 굽어보았지만 이렇게 패점을 기록하니 세상이 모두 싫어지는 것을 어찌 인간의 옹졸함이라고만 치부하겠는가. 일행을 더욱 끓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첫판을 조훈현이 이기자 계속 굳은 표정으로 대하던 개최자 잉창치씨가 2국에서 네웨이핑이 한판을 만회하자 일일이 선수단 일원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기는 것만이 능사요, 이긴 자만이 강자였다.

6박7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제3국이 열리는 영파로 이동했다. 3국이 벌어지는 영파엔 아예 기차 한칸을 통째로 빌려서 한국선수단이 이용했다. 아마 2국을 이긴 중국의 호의가 아닐까 싶었다. 4시간의 여행 끝에 도착한 영파역. 미리부터 장시간 대기했을 것으로 보이는 인파의 물결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네웨이핑에게 혼쭐날 것으로 기대되는 조훈현을 보기 위함이었다.

네웨이핑은 대단한 스타였다. 스포츠 스타처럼 그는 대접받고 있었다. 하기야 바둑은 중국에서 스포츠의 하나로 대접받고 있다. 중국 바둑협회도 체육부 산하의 바둑국 소속이다. 따라서 중국은 거대한 바둑행사를 하게되면 정치적 거물이 나서곤 한다.

운명의 제3국. 이 한판은 천당과 지옥의 갈림길이 아닐 수 없다. 애당초 5번기가 이제 3번기로 줄어들었다. 그러니 삼판양승의 첫판인 셈이다. 이긴 자는 축배를, 진 자에겐 쓰디쓴 고배가 기다리고 있다. 분위기는 그래도 조훈현쪽이었다. 어차피 백을 든 쪽에서 막대한 덤을 방벽삼아 유리한 판세를 보여왔으니 객관적인 근거도 될 수 있었다. 그랬다. 백을 들었으니 조훈현은 기량 외적인 부분에서 이미 앞서갈 수 있었다.

백을 들었지만 조훈현은 필요 이상으로 움츠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약간 흐름이 좋지 않다 싶더니 그만 심안이 흐려진 탓일까. 상대의 진영에 잠입하여 모조리 깎아먹는가 싶었는데 패를 몰아야 할 곳에서 엉거주춤하여 그만 이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딱 한줄 차이, 한칸 차이는 그것으로 ‘승부끝’이다. 한쪽은 정답이고 비슷한 다른 쪽은 오답이다. 나설 때를 놓치고 참을 때를 기다리지 못하면 그것은 이미 패전의 길이다. <계속>


<뉴스와 화제>

· 5월 세계대회 러시

5월엔 무려 5개의 세계대회가 줄을 이어 개최되는 ‘세계대회의 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4월30일부터 시작된 제4회 응씨배가 4일까지 4강진출자를 가리고 연이어 제4회 LG배가 유창혁과 중국위 위빈간의 대결로 3국부터 이어진다.

현재 스코어는 1:1. 17일부터는 춘란배 4강전이 속개되고 26일부터는 제12회 아시아 TV선수권전이 경주에서, 또 30일부터는 역시 경주에서 후지쓰배 8강이 펼쳐진다.

· 불패소년 이세돌 28연승 질주

연승행진을 벌이는 이세돌 3단이 지난주에 또다시 2승을 추가, 28연승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기록은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인데 지난주엔 연승행진의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였던 서봉수 9단과의 대국이 들어있어 가치를 더했다.

역대 3위 기록인 조훈현의 31연승엔 3승을 남겨두고 있다. 한편 이세돌의 다음 상대는 강호 유창혁이 유력시되었으나 세계대회 일정관계상 대국이 연기됨에 따라 이세돌의 연승행진엔 파란불이 켜진 셈이다.

입력시간 2000/05/05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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