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심리와 황색 저널리즘

“의뢰인은 성인이 아니야. 성인이 변호사를 고용하겠나? 외뢰인을 위해 봉사한 후 수임료를 잘 챙기는 게 변호사인 우리의 일이야. 야망에 찬 네가 변호사가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하기 싫어서 유명한 나를 찾아온 것 아닌가.” 맡는 사건마다 승소하는 유능한 변호사가 거짓과 음모로 얼룩진 법조계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신참 변호사에게 하는 충고이자 경고다.

일반인이 갖고 있는 기대치와 현실의 간극이 큰 직업으로는 교수, 언론인, 의사, 법조인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정치인이나 사업가에게는 애초부터 청렴을 기대하지 않으며 농사꾼이나 공장 노동자에게는 남을 크게 기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글렌 조단 감독의 1998년 작 <지나 거손의 스캔들:Legalese>(18세 이용가, 우일 출시)은 그런 전제 하에서 이야기를 펼친다.

변호사 세계를 주축으로 하여 연예인, 언론인의 속임수, 조작, 배신, 음모를 그린다. 범죄 심리 스릴러, 법정 드라마 장르의 상업성에 충실하여 작품성 운운할 정도는 못되지만 아무런 언급 없이 내던지기도 아까운 영화다.

범죄 심리, 변호사의 양심과 야망, 특종을 노리는 언론인, 황색 저널리즘이 극단적인 비난도, 엄청난 칭찬도 베풀기 어려운 만큼만 묘사되고 있다.

배우 진용도 마찬가지다. 박스 오피스를 좌지우지할 스타는 없지만 연기 경력이나 개성에 있어서는 그다지 빠지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중량급 배우를 4명씩이나 끌어들여 물리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말 제목에는 ‘지나 거손’이 붙었지만 경력으로는 다른 출연진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지나 거손이 상업적으로 성공한 <바운드> <쇼걸> 출연으로 국내에서 특히 이름을 얻은 점을 이용한 것일 뿐.

섹시한 모델 겸 배우인 안젤라 빌(지나 거손)이 여동생 메리의 남편인 조각가 오스카를 권총으로 쏘아 죽여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여동생을 폭행해왔으며 자신마저 강간하려 해 정당 방위였다고 호소한다.

유죄 혐의가 짙은 용의자도 무혐의로 풀려나게 할 정도로 유능한 고참 변호사 노먼 킨(제임스 가너)은 안젤라의 의뢰 전화를 번번이 따돌린다. 노먼이 신경 쓰는 것은 카니 청이나 제인 폴리, 테드 카펠과 같은 유명 언론인이 “안젤라 사건을 맡기로 했는가”고 묻는 전화가 왔는가 하는 점이다.

한참을 퉁기던 노먼은 신참 변호사 로이 가이톤(브라이안 도일 머레이)에게 안젤라 사건을 맡긴다.

“나는 지난 빌리 조 사건으로 6개월간 TV에 노출되어 신비감이 없어졌다. 승부는 법정이나 판결이 아닌 TV에서 난다. 빌리 조는 92%의 시민이 유죄라고 생각했는데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니 내가 다시 사건을 맡으면 안젤라는 희생양이 될 우려가 있다. 변호 경험이 없는 신참이 이 사건을 맡으면 대중의 동정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노먼의 변이다.

유명한 사건은 언론 조작, 군중 심리에 의해 판결이 가름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음을 노먼은 오랜 경력으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이는 노먼의 지시와 노먼의 비서 리카 마틴(메리 루이스 파커)의 육탄 공세를 받으며 언론 앞에 서고 로이의 뒤에 노만이 있음을 감지한 황색 언론의 대표주자 브렌다(캐서린 터너)가 끼어 들어 일은 복잡해지는데.

옥선희 비디오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0/05/0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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