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어리 너츠 감독의 1997년 작 <굿바이 아메리카:Goodbye America>(12세 관람 가, DMV 출시)는 필리핀의 수빅만에 주둔해온 미군이 철수하던 1992년 11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91년 필리핀은 미군의 철수를 요청함으로써 100여년동안 빼앗겼던 땅을 되찾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1992년 11월24일 완전철수 이후 8,000여명의 자원봉사자에 의해 수빅만은 10만평의 땅에 2,00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선 자유 무역항, 경제 특구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영화는 이런 성공이 있기까지의 어려움과 그늘을 기지촌 여성을 통해 되돌아본다. 1980년대 후반, 필리핀의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며 미국과 필리핀 간의 협상에 관여했던 마이클 셀러스가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인물의 이후를 자막 처리하는 등, 마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영화는 픽션이다. 사실이든 픽션이든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려운 영화다.

주둔군 입장에서도 명암, 득과 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국 땅을 내준 약소국, 좁게는 기지촌 주변 사람의 삶에 미친 주둔군의 영향은 그보다 크고 심각하다. 그들이 뿌려댄 달러, 싸구려 문화, 성에 대한 의식 등 청산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청산하기 어려운 유산도 있음을 영화는 솔직히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 만든 영화라서 필리핀의 입장이 진솔하게 그려지지 못했을 것이란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데 우려를 하지 않아도 좋을 수준이다. 주한 미군과 기지촌 이야기를 이 정도라도 까발릴 수 있을까를 묻는다면 대답은 No일 것이다.

수빅만의 미 해군기지는 10일후의 완전철수를 위해 특별령이 내려져있다. 함장 해밀톤(울프간 보디손)과 특수수사요원 댄직(레이 돈 총)은 군의 해이와 반환식을 노리는 불순분자를 경계한다.

단짝인 윌리엄 호크(존 하이메스 뉴톤), 폴 블레이든(알렉시스 아퀘트), 존 스트라이잭(코린 네멕) 대위는 영외로 나갔다가 호크의 방자한 행동에 위협을 가하는 원주민을 보고 놀라 내뺀다. 미국인 에드(제임스 브롤린)와 원주민 엔트(다리아 라미레즈) 부부가 경영하는 비치 바에 들른 세 명의 군인.

존은 시장의 보좌관 엔트의 딸 리사(나네트 메드베)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있지만 리사는 주둔군에게 몸과 마음을 내준 어머니와 사촌에 대한 반감 등으로 마음을 열지 않는다. 반환식에 참석할 예정인 상원의원 제임스 블레이든(마이클 요크)의 아들 폴은 리사의 사촌인 창녀 엠마(알마 콘셉시온)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보좌관인 미국인 약혼녀가 있는 몸.

다혈질의 사고뭉치 존은 시골에서 막 올라온 엠마의 여동생 마리아(엔젤 아퀴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

네 명의 미국 남성과 네 명의 필리핀 여성의 관계는 곧 미국(미군)과 필리핀(기지촌 사람)의 관계를 상징한다. 오랜 주둔으로 양국인 간에 사랑이 싹 트기도 했지만 사랑을 키우고 열매 맺는 것은 싹을 틔우는 것보다 더 어려워보인다.

“왜 이 땅에 10년 넘게 살면서 우리 말을 배우려들지 않느냐”는 리사의 항변이 설득력있게 들린다. 반면에 “3,000m의 산을 밀어내고 이만한 기지를 만들어 놓았는데 정치놀음 때문에 떠나야 하느냐”고 주장하는 존의 삐뚤어진 애국심은 미국의 오만한 세계경찰 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0/05/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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