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 속에 뒹구는 국군의 유골

분단된 남북 베트남이 통일된지 25주년을 맞았다.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만8년동안 31만여명의 국군을 파병, 남쪽 월남을 지원했으나 1975년 4월30일 북쪽 월맹군의 사이공 함락을 지켜봐야 했다.

이 전쟁은 지금껏 ‘이념 전쟁’으로만 간주되며 그 언급이 금기시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4반세기의 세월이 지나고 냉전시대의 초국가적 이념대결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난 지금, 우리는 좀더 냉철하게 이 전쟁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전사·실종자를 둘러싼 참전의 이면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주>


의문의 실종자들

“전쟁때 실종된 ‘따이한’을 본 적 없습니까?”

지난 4월18일 호치민(옛 사이공)에 도착한 이후 9일 동안 많은 베트남인에게 이같은 질문을 던졌으나 아무도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다. ‘나트랑 쪽에 백마부대 김중위가 월남 여자와 살고 있었다’는 등 호치민 주재 한국인 원로들의 이야기도 확인 결과 모두 풍문에 불과했다.

한국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다낭에서 호치민까지 1,100㎞의 1번 국도를 따라가며 수소문했으나 이마저 허사였다. 1993년 5월 내한한 웬 만 컴 전 베트남 외무장관의 발표대로 베트남 어디에도 ‘길 잃은 참전용사’는 없었다.

그렇다면 국군 실종자(MIA)는 없었는가. 국방부는 전쟁 당시에도 일체의 실종 사실을 부인했고 공식적인 기록인 ‘파월한국군 전쟁사’(1985년)에서도 “단 한명의 실종·포로도 없다”고 기술했다.

포로 없는, 실종자 없는 전쟁이 있을 수 있을까. 참전용사 가족의 민원이 속출하자 국군 철수후인 1973년 3월, 1992년 2월, 그리고 1994년 4월22일 손실 현황이 발표됐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안학수(건설지원단)하사, 김인식(주월사 태권단)대위, 박성열(수도사단)병장 등 3명은 월북됐다.

이는 1969년 9월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된 뒤 귀순한 정모(65)씨의 진술과 북측의 선전자료에서 확인됐다. 정씨는 “안 하사와 박 병장은 1967년 4월 평남 대동면에 위치한 ‘의거자 정치학교’에서, 김 대위는 평양초대소에서 교양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시체를 찾진 못했으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박우식(9사단)대위와 안상이 병장, 이용선 상병(이상 해병2여단) 등 3명은 전사처리됐고 김인수(9사단) 상병은 순직 처리됐다. 정준택(주월사)하사는 아직도 수배중이다.


증폭되는 의혹

취재과정에서 서울대 전경수(全京秀) 교수로부터 확보한 미 국방부의 ‘전쟁포로/실종자 담당국’(Defense Prisioner of War/Missing in Action Office;DPMO)의 비밀문서도 국군 MIA 문제와 관련해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개인 파일 형식으로 된 이 문서에서는 박 대위와 김 상병에 대한 언급이 없는 대신 박정완(태권도단)중위와 조준범(100군수사)중위에 대한 실종 사실이 추가됐다.

박 중위(태권도 교관)는 1968년 월맹군의 구정대공세 때 포로가 됐다 캄보디아 등에서 18개월간 감옥생활을 한 뒤 이듬해 9월 한국 정부의 교섭으로 석방돼 현재 미국에 살고 있고, 조 중위는 1972년 3월29일 탈영후 1974년 4월13일 복귀한 것으로 처리됐다.

하지만 국군 실종자에 대한 의혹은 취재가 진행될수록 증폭됐다. 참전용사들로부터 실종자 발생을 시사하는 증언이 쏟아졌다.

주월 한국군사령부 민사심리전처에 근무했던 이윤경(56·호치민 교포)씨는 “1971년에만 4명의 실종자가 발생, 수배한 적이 있으나 생사확인이 안됐다”면서 “특히 나와 이름과 비슷한 이윤종 상병은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연락장교 출신 김모(57)씨는 “당시 북한측이 배포한 선전자료 중에는 김기정 남상욱 등도 귀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면서 “특히 탈영병 수십명이 종전후 호주 필리핀 이라크 등 제3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전경수 교수가 1993년 공개했던 월맹군의 ‘전황보고’도 재검토가 요구되는 관련 자료다. 월맹군이 1968년 발간한 이 보고서에는 “3월13일 메콩 삼각주 꼬치에서 260명 승선한 병력수송선 격침”“7월26일 다낭에서 260명 사망, 부상, 체포” 등 실종자의 발생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조작된 전투상보

실종자 의혹은 전쟁 당시 일부 국군 지휘관의 업적주의적 행태와 연관된다. 전공을 높이기 위해 허위조작한 보고가 있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전공을 삭감할 수 있는 손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당시 포병장교로 참전했던 군사평론가 지만원씨의 증언은 그 일례에 불과하다.

“베트콩 소굴이라는 지역에 A연대와 B연대가 나란히 투입돼 산악작전을 실시했다. B연대는 적정이 별로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질서가 문란했고 야간경계도 소홀했다. 이를 얕본 베트콩이 B연대의 숙영지를 공격해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날 B연대장은 피해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대로 보고하면 군법회의감이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밤 난데없이 포성과 총성이 B연대 지역에서 흘러나왔다. 그 총소리는 연대가 베트콩과 교전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한 ‘교전쇼’였다.

상황보고가 잇따랐다. 전날밤 전사한 병사들은 그 다음날밤 교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꾸며졌다. 3정의 총을 노획했고 베트콩 10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노획했다는 AK소총은 암시장에서 한 개당 150달러에 구입해서 헬리콥터로 올려간 것이었다. 당시엔 AK소총 한 개만 있으면 3~4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것으로 써주었다. 벌을 받아야 할 부대가 훈장을 받았다.”

지씨가 밝힌 B연대장은 누구나가 알만한 정치군인이다. 전과는 자세하게, 그러나 손실은 불분명하게 기록한 관행은 실종자의 확인을 어렵게 한다.

미 국방부 문서는 대부분 실종자의 실종날짜에 있어 우리 국방부의 자료보다 앞선다. 이는 국군이 전쟁중 실종자가 발생하자 처리를 미적거리다 나중에 실종신고를 한 것으로 추론된다.


뒤죽박죽인 전사자 통계

엉터리 기록은 결국 전사자 파악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방부가 1994년 발표에서 총사망자를 5,066명으로 재확인했지만 관련 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발표기관마다, 시기마다 최대 수백명씩 차이가 나자 참전전우회마저 “대충 5,000명쯤 죽은 거 아닌가요”라며 덮어두는 분위기다.

이세호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국군이 완전 철수한 1973년 5월 국회본회의에서 “전사 3,844명, 전상 8,344명, 비전투요원 손실 3,738명의 인명 피해를 낸 것은 가슴 아픔 일”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85년 발간한 주월한국군 전쟁사에서는 전사자 3,806명, 순직 및 사망 1,154명 등 총 사망자가 4,960명으로 바뀐다.

국방부는 이어 1992년 2월29일 발표에서 육군 3,530명 해군 1,094명 등 전사자 4,687명과 순직 등 기타 사망자 364명으로 총 5,051명 사망으로 수정했다. 순수 전사자수가 7년 사이에 800명 이상 늘어난 것이다.

전사자에 대한 ‘고무줄 통계’가 계속되자 자민련 안보특별위원회가 지난해 실시한 월남전 심포지엄에서는 사망자수를 5,083명으로, 지난 4월6일 AP 통신이 보도한 베트남 종전기획기사에서는 5,077명으로 다르게 기록됐다.

더구나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는 현재 혼백만 있는 위패 2개를 포함, 총 4,687기의 묘가 있다. 전사자 중 일부는 가족의 뜻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했다는게 현충원측의 설명이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현충원측은 또 전사자 명단은 정리된게 없다는 입장이다.

전사자 집계가 이처럼 뒤죽박죽인 것은 전투상보와 일지가 애초부터 잘못 기록됐거나 일부는 아예 소실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실제로 1992년 고엽제 피해자들이 전공상(戰公傷) 심의를 받기 위해 서류를 신청했으나 대부분이 파월기록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참전 여부에 관한 개인기록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글속 유골

국군 참전사의 또다른 의혹은 국군의 유골이 지금도 정글 속에서 뒹굴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점이다. 지난 4월22일 방문한 베트남 중부의 퀴논. 이 도시 외곽 지역은 맹호부대(수도사단)의 주둔지였다.

이곳에서 약 20㎞ 떨어진 조그마한 마을 안년군의 인민위원회 앞에는 한국군 최대 격전지였던 앙케 전투에서 사망한 월맹군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앙케전투는 국군과 월맹군이 1972년 4월18일부터 5월15일까지 한달 가까이 벌인 정규전으로, 양측에서 수천명의 희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빼곡히 적힌 월맹군 전사자의 이름 사이에 간간이 행렬을 끊는 20여개의 ‘검은 줄’은 유해는 있되 신원을 모르는 ‘무명씨 전사자’들이다.

바로 국군 전사자들이다. 동행한 베트남인은 “이 추모비는 앙케 전투에서 숨진 군인을 집단매장한 후 마련됐다”면서 “무명의 전사자들은 당시 신원파악이 불가능했던 따이한(大韓)군”이라고 설명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인민위원회 간부라는 사람이 사진촬영은 곤란하다고 막았다. 3, 4년전 이곳을 찾은 재베트남 동포 정주섭(65)씨는 “당시 지역 당간부는 ‘인간은 죽은 후에는 적과 아군이 따로 없다’고 말하면서 함께 명복을 빌자고 권했다”고 말했다.

퀴논시에서 돌아다니는 국군의 인식표도 주목된다. 골동품점에서 구한 인식표에는 김모라는 성명과 군번 120470○○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베트남 상인은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군 참전용사들이 기념으로 인식표를 구입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면서 “작전중 분실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전사자 수습 과정에서 유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인식표는 생명과 동일시돼왔다.

국방부는 지금껏 베트남 전쟁과 관련, “단 1구의 유기된 유해나 실종·포로도 없다”고 공언해왔다. 군은 “유해수습이 최고의 전투방침이었으며 특히 독자적인 공중작전이 없었던 데다 작전통제지역 안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이 문제는 1992년 베트남과의 수교과정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100% 유해수습은 불가능한 일

국군은 미군에 비해 직접적인 교전은 적었으나 만8년의 참전기간 동안 7,000㎦에 이르는 책임지역에서 대부대 작전 1,174회 등 총 57만7,476회에 걸친 작전을 펼쳤다.

소규모 전투가 주종을 이뤘으나 전투규모·기간 등을 고려하면 국방부 주장대로 ‘100% 유해 수습’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해처리 과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성조기를 둘러친 알루미늄관에 시체를 넣어 송환했던 미국과는 달리 국군은 1970년대초 전황이 급박해지자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놓고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화장한 후 전사통보를 하고 국립묘지에 유골함을 묻는 경우도 많았다.

참전용사 김모(57)씨는 “당시 나트랑 소재 100군수사령부 영현중대 등에서 화장처리를 했다”면서 “유해의 일부가 유실된 경우 나무로 채워 화장하는 등 완벽을 기했지만 종종 시체는 10구인데 전사명단에는 1,2구씩 추가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청룡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던 이모씨는 “전사자 유해를 찾기 위해 대대병력이 동원됐으나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2차례 있었다”면서 “특히 전과를 올리기 위해 베트콩을 추적하다 오히려 유인돼 고립, 실종된 전우들이 나중에 보니 전사처리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맹호부대의 유종철 일병은 앙케 전투에 투입됐다 11개월 간의 포로생활후 1973년 3월27일 귀국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그는 이미 전사자로 처리돼 있었다. 유씨는 당시 ‘살아온 전사자’로 화제를 일으켰다. 또 “1967년 9월 다낭 주둔 청룡부대 소속의 초소가 홍수에 유실돼 유해 여러 구를 찾지 못하는 등 자연적 요인에 의해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참전 용사들은 증언했다.

국군의 유골은 다시 되찾아야 한다. 헌법에 따라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다면 이국의 전장에 나가 숨진 우리 군인의 유해를 찾아오는 것은 국가가 해야할 기본적인 의무다. “정글에 뒹구는 유골을 방기하면 앞으로 누가 나라 위해 총을 들 것인가”라고 말하는 한 참전용사의 절규가 생생하다.

이동준 국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4 17:14


이동준 국제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