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근로시간 단축'

한국IBM 영업부에 있는 조모(38)씨는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기분이 든다. 한국IBM은 우리나라 100대 기업 중 LG칼텍스정유(주)와 함께 매주 토요휴무제를 시행하는 회사다.

조씨는 그래서 가족과 여행을 가거나 아이들과 함께 주말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금요일 근무를 마친 후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주말을 망치기 때문이다.

모 중견기업의 부장으로 근무하는 이모(40)씨는 토요일에 출근을 하려면 짜증이 난다. 집이 있는 경기 시흥에서 출근하기 위해 1시간~1시간30분은 전철과 버스에서 낭비하고 점심식사를 하고 오면 퇴근준비를 하느라 정작 근무시간 3~4시간에 출퇴근 시간 3시간 안팎을 쓰는 셈이다. 업무효율이 오를 리가 없다.


노동계 요구에 재계 강력 반발

근로시간 단축이 또다시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한국의 근로자와 그 가족이라면 거의 대부분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사용주를 대표하는 재계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정부는 1998년 2월 노동계와 근로시간 단축문제를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논의하기로 합의했지만 지금까지 논의가 거의 없다가 최근에야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특위를 구성키로 합의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올해 임금협상에서 법정근로시간을 현행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방침인 반면 재계는 임금삭감없는 근로시간 단축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노·사간에 근로시간 단축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과연 한국에서 이 시점에서 주5일근무제를 도입하는게 바람직한가. 재계를 제외하고는 전문가나 노동자를 가릴 것없이 압도적인 다수가 찬성하고 있다.

5월4일 KBS가 근로시간 단축을 주제로 방영한 ‘길종섭의 쟁점토론’시간중에 있은 전화여론조사에서도 찬성이 반대보다 두배 이상 많았다. 올해 2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20세 이상 남녀 1,018명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6.5%가 “토요일 오전근무제가 비효율적”이라고 응답했다.

근로시간 단축은 단순히 ‘노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차원을 넘어 한국의 경제·사회 양태를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덕성여대 신화용 교수(가족학)는 “지금까지 직장에만 매달려 살아온 가장에게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늘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가장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무분별한 음주문화가 개선되는 것은 물론 청소년 문제 등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외식·레저산업에 큰 영향

주5일 근무제는 외식산업이나 레저산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일부에서는 주5일근무제가 ‘소비를 조장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산업부양 및 고용유발 효과가 훨씬 크고 특히 유흥업소가 축소되고 가족 중심의 건전한 레저산업이 활성화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정보화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체질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근로시간 단축은 시급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소영 박사는 “연봉제와 능력급제, 경제 전반의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기업경영주들은 여전히 비용절감으로 수지타산을 맞추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제체질을 바꾸기 위해서도 근로시간 단축을 시행하는 것은 지금이 적기”라고 지적했다.

경기활황이 지속될 경우 근로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근로시간 단축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근로기준법 제정이후 36년만인 1989년 법정근로시간이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될 때도 재계에서는 비용부담이 늘어나 기업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했었다.

하지만 막상 시행이후 그같은 부작용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오히려 기업이 생산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시장에 적응했다는 것이다.

월간 현대경영이 1998년 말을 기준으로 국내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8개업체가 월 1회 이상 토요휴무제를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제조업 등 업종별 도입시기를 조정하고 연월차휴가나 생리휴가 등 휴가제도를 정비하면 제도도입에 따른 충격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더욱이 토요휴무제를 실시하고 있는 기업 관계자들은 토요휴무제로 인한 부작용은 거의 없는 반면 생산성은 높아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여론에 밀린 경제 논리

그러나 법정 근로시간 단축은 단순한 경제논리 보다는 여론의 흐름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IMF 외환위기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게 국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선뜻 자신있는 답변을 못하고 있다.

반대여론이 조금이라도 표출될 경우 재계의 목소리는 엄청난 힘을 얻기 때문이다.

기획예산처가 주5일근무제로 가기전에 과도기적으로 관공서의 토요격주 전일근무제와 초등학교 주5일 수업제를 제안한데 대해 관련 부처가 눈치만 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 행정2팀 박실 팀장은 “토요 격주 전일근무제는 근로시간을 유지하면서도 토요 오전근무로 인한 교통체증과 에너지낭비 등 불필요한 관리비용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데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을 제외한 28개국이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고 중국 태국 필리핀 폴란드 루마니아 몽골 인도 등도 주5일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같은 토요 오전근무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싱가포르 말레시아 스리랑카 정도다. 현재 초·중등학교의 주5일 수업제와 공무원의 토요 격주 전일근무제를 시행에 필요한 법적 장치는 모두 마련돼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주5일수업제의 주무부처인 교육부는 “부모가 학생을 돌볼 수 있게 주5일근무제 가 선행되어야 하고 지역사회의 프로그램이 활성화하는 등 사회적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YMCA 신종원 시민사회개발부장은 “초등학교의 경우 이미 토요일에 수업은 하지 않고 특기활동을 하고 있다”며 “현재 여건에서도 주5일수업제는 충분히 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무부처도 눈치만

관공서의 토요 격주 전일근무제 주무부처인 행정자치부도 9일 토론회를 갖는 등 여론탐색에만 주력하고 있다.

행자부 관계자는 ‘토요 격주 휴무제’가 아닌 ‘토요 격주 전일근무제’라고 강조하면서 “이 문제는 섯불리 결정하기 힘든 아주 민감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제도도입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자칫 욕먹기 쉬운 일을 나서서 주도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청주대 정정목 교수(행정학)는 “공무원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주5일근무제와 주5일수업제는 이유와 명분을 어떻게 내세우느냐의 문제일 뿐 하루라도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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