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우요쿠’(右翼)는 보수적 이념 성향인 ‘우익’보다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천황주의,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우익단체’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부정적 어감이 강해 언론은 보통 ‘정치 단체’라고 쓰지만 때로는 비난의 뜻을 담아 그대로 쓰기도 한다.

우요쿠의 부정적 어감은 무엇보다 침략과 전쟁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위험한 성격 때문이다. 폭력단과 관련을 맺은 조직이 적지 않은데다 먹고 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기업이나 업계단체 등을 괴롭히는 ‘이야가라세’(嫌がらせ)를 일삼은 것도 사회적 혐오를 유발했다.

흔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본 사회의 중심은 아니다. 현재 일본 공안 당국은 1995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를 자행한 옴진리교, 나리타(成田)공항 건설 반대 투쟁으로 유명한 ‘가쿠마루’(核丸) 등 급진세력, 조총련과 함께 우요쿠를 주요 감시대상으로 삼고 있다.

‘우요쿠’의 역사는 메이지(明治)정부의 서구화 정책에 반대, 무사 반란이나 자유민권운동에 관여해 반정부 운동을 폈던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등이 1879년에 ‘고요샤’(向陽社)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1881년에 ‘겐요샤’(玄洋社)로 개칭한 이래 자유민권운동에서 손을 떼고 청일전쟁과 대륙진출 등 대외 강경책을 주장하는 국가주의 단체로 성장했다. 이후 우후죽순처럼 태어난 우요쿠는 천황중심주의와 국가주의를 핵심으로 해 대아시아주의 등으로 이념적 공간을 넓혀갔다.

김옥균(金玉均)이나 쑨원(孫文) 등 아시아 각국의 민권·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한편 러일전쟁과 한일합방 등을 주장하는 모순된 모습을 드러냈다.

제1차 세계대전후 일본의 국제적 고립이 커지면서 파시즘적 성향의 우요쿠가 새로 등장, 공산주의·민주주의·자유주의에 모두 반대하고 대아시아주의에 바탕한 대륙침략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낭인 무사를 대륙으로 보내는 한편 군부내의 파쇼세력과 결합해 전쟁의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테러를 자행하는 극단적 행동으로 탄압을 받았고 이론적 기반이 허약해 대중적 기반은 두텁지 못했다.

전체적으로는 일본의 파쇼화를 촉진하는데 그쳤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직접 전면에 나서거나 중심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일정한 자극·촉진제 기능은 맡아온 우요쿠의 속성은 전후에도 이어졌다.

패전후 미군정하에서 우요쿠는 350여 단체중 237개가 강제해산되는 등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활, 천황·반공·재무장·개헌을 화두로 공공연한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혁신세력의 반정부 활동이나 평화운동에 위기감을 드러냈고 1960년 아사누마 이네지로(淺沼稻次郞) 사회당위원장을 자살(刺殺)하는 등 테러를 자행했다.

이들은 유착, 또는 막후 거래로 역대 자민당 정권에 영향력을 미쳤다. 자민당은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들을 이용했다.

물론 1996년 주택금융전문회사(住專·주센)의 도산 처리책에 반발, ‘닛폰고민토’(日本皇民黨)의 가두방송차가 국회 정문을 들이박고 불타는 등 양측의 대립도 수시로 있었다. 이는 전술적 제휴 관계에도 불구하고 우요쿠가 자민당과는 계통이 다른 세력이기 때문이다.

현재 자민당 강경파인 에토(江藤)·가메이(龜井) 그룹의 정치적 주장은 우요쿠의 그것과 부분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거리가 있고 특히 자민당 중심세력인 중도보수파와는 크게 동떨어져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부치파로 이어져 내려온 자민당 중심세력이 우요쿠를 견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제어장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총리의 집권 이후 자민당은 보수적 정책에 매달려 주변국의 우려를 샀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부치파의 건재가 일본의 우경화를 막는 방패막이로 여겨져왔다.

오히려 오부치 전총리가 갑자기 쓰러진데 이어 후견인인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총리마저 정계를 은퇴, 오부치파의 당 장악력이 쇠퇴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더욱 불안하다. 중심세력의 부재로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물론 우요쿠도 덩달아 세력 확대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2000/05/1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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