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 있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대통령의 만남은 어떤 메세지를 던져주는 것일까.

DJ는 ‘행동하는 양심’, ‘대중경제론’, ‘햇볕정책’ 등 비교적 용어 선택에 자신이 있는 정치가다. 특히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식견있는 실용주의자’라고 표현했던 것도 선택의 폭을 넓힌 것이다.

이에 비해 YS의 용어사용은 ‘확실히’를 ‘학실히’로, ‘비핵지대화’를 ‘원자로’로 실언하는 등 솔직하고 당돌한 면이 많다.

‘김영삼 회고록’에는 ‘눈물과 땀과 민주주의’, ‘민주화’, ‘독제자’, ‘군사 독재정부’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온다. 특히 YS의 마음을 엿보이게 하는 말에는 ‘마음 아프게’라는 대목이 있다.

이 말을 DJ는 이날 청와대 면담에서 썼다. “오해도 있지만 어떻든 간에 서운하게 생각했다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DJ는 YS가 1992년 12월19일의 대통령 당선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YS는 그때 기자들에게 말했다. “김대중씨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30년간 민주화를 위해 함께 투쟁해온 동지다.

비록 방법이 다소 달랐고 간혹 문제도 있었지만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정계를 떠나서라도 둘이서 가까운 시일내에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은 지켜지지 않았다.

YS는 1995년 3월31일 부산·경남 연두보고에서 YS의 북한정책을 비난하는 DJ를 간접으로 비판했다. “아직 북한에 동조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라는 표현은 YS가 부드럽게 말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현직 대통령이 고집센 전직 대통령에게 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니다. 가슴에 와닿는, 어떤 동지애 때문일 것이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논설위원 시게무라 도시미츠는 1980년대 서울특파원으로 있을 때 만났던 DJ와 YS를 간단하게 평했다. DJ는 ‘내 편이 아닌 자는 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죽을 고생을 계속해온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YS는 ‘적이 아닌 자는 모두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먼저 되었다고 분석했다.

YS 대통령 시절 5년간 청와대에 출입했던 조선일보 정치부 김창기 부장은 두 사람 관계를 ‘김영삼론’에서 재미있게 분석하고 있다.

“YS는 DJ를 대단히 경계했고 불신했고 멸시했다. 과연 YS가 진정으로 DJ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까 의심하고 있다. 어쩌면 그 역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흔히 두 사람 관계를 ‘경쟁과 협력의 관계’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경쟁관계였고 적대관계였지, 협력관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NHK 취재반이 구성해 DJ 자신이 직접 감수한 ‘김대중 자서전-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에는 YS에 대한 여러가지 단상이 있다. 그중 DJ가 YS와 함께 벌인 민주화운동에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대목이 있다.

1987년 12월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하고 두 사람이 모두 낙선하고 나서였다. “나는 지금까지 반평생을 살면서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나라도 양보해서 불출마를 단행하지 못한 것을 그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일부 사람의 일시적인 흥분에 말려든 것을 지금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그때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던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국민의 염원을 먼저 생각하고 내가 양보해야 했다. 야당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염원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 반성하고 있다.”

그때 DJ는 ‘가슴 아프게’라는 말을 몰랐고 ‘유감’, ‘후회’, ‘솔직한 심정’ 등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김영삼 회고록’에는 1987년의 단일화 실패를 DJ가 군정종식의 확실한 담보인 단일화에 반대하는 바람에 자신의 확실한 당선을 앗아간 것으로 적고 있다.

“김대중은 자신의 역사적 소명에 대한 판단착오를 일으켰다. 시대의 요구는 ‘군정종식’이었으나 그는 ‘세력확대’의 전략을 세웠다”고 결론내렸다. ‘가슴 아픔’이 다시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두사람의 소명일 것이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입력시간 2000/05/1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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