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가슴이 죄어온다. 어차피 자신과의 승부인줄 잘 알면서도 왜 앞에 앉은 네웨이핑의 얼굴을 보고 싶고 또 그의 눈을 보고 싶은가. 그도 나만큼 괴로울까.

이윽고 조훈현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다림의 소산이었다. 별명 ‘반달곰’처럼 묵묵부답으로 의연한 척 부동심을 지키던 네웨이핑이 이상하리라 만큼 착수를 않는다. 뻔한 곳에서 말이다. 조훈현이 당연히 선수라고 단수를 몰자 재빨리 받아야 하건만 네웨이핑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일까. 조훈현이 오히려 묘한 느낌을 받는다. ‘혹시 내가 잘못 둔 건 아닐까? 당연히 단수인데 왜 안받는 것이지? 오냐, 그래 저 친구에게 지금 헛것이 보이는거야.’

그런 건 피부로 느낄 도리밖에. 자신이 지쳐있다고 느끼는 순간 상대에게서는 한계가 왔다는 신호가 내려오고 있었다. ‘한계’ 이후에도 무려 140수가 지나간 다음이니 무던히도 오래 걸린 한판이라 하겠다. 지긋지긋한 끝내기 단계에 들어섰지만 조훈현이 안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측에서 나온 얘기는 반집이 두텁다는 것. 세상에 반집을 앞선다는 얘기를 듣고 승리를 예감할 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리한 인내의 공방이 끝간데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훈현이 불리해 보인다는 얘기는 드물었다.

‘그래, 이거야.’ 조훈현의 눈이 번쩍 뜨인다. 선수로 제1선을 밀자 한참을 들여다보던 네웨이핑은 대뜸 손을 빼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횡재인가. 조훈현은 파리채를 휘두를 때보다 재빨리 백 두점을 잡아먹었다.

그것은 결승타에 다름아니었다. 조훈현의 양발은 무서운 속도로 떨리고 있었다. 긴장을 숨기고 싶지만 부지불식간에 몸밖으로 새어나오는 걸 자신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제는 이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뜻이 된다.

같은 시각, 검토실의 한 구석에서는 여인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다름아닌 네웨이핑의 아내 공상밍. 그도 엄연한 프로기사요, 판세를 읽고도 남음이 있는 세계 최강의 여류기사. 그렇다면 그녀의 울음은 남편의 석패에 대한 애절한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대2.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일이 이쯤 되면 누가 이겨도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측에서는 당연히 조훈현의 역전극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흥분하고 있었다.

첫째, 우여곡절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대회 진행을 모두 극복했다는 점이고 둘째, 4국을 이겨서 흐름이 우리에게 쏠려있다는 점이었다. 대회장소가 모두 네웨이핑에게 유리한 중국과 싱가폴이란 점은 조훈현의 심리적 부담을 극대화시켜 단기전으로 치르자는 중국인의 심사가 담긴 계략이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쓰러질 듯한 상황에서도 들풀같은 생명력으로 1승2패의 위기를 벗어나 어느새 대등한 위치까지 내달았다. 일이 이쯤 되면 답답하기는 네웨이핑 쪽이 더하다.

대망의 한판. 건곤일척의 한판. 그것은 심장의 승부요, 일생일대의 빅쇼임에 틀림없다. 조훈현이나 네웨이핑이나 앞으로 얼마를 더 살아갈지 몰라도 이 이상으로 기억에 사무치는 한판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승리의 환호와 패배의 탄식은 절대치가 무한대로 높아질 것이다. 누가 그 환호의 중심에 설 것인가. 드디어 해가 밝는다.

한국측 단장 윤기현은 선수의 기를 살리기 위해 나섰다. 눈꼽만큼이라도 선수를 위한 일이라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치 야구감독이 자기 선수의 기를 살리기 위해 심판과 삿대질을 하는 것과 흡사했다. 계시기 교체와 초읽기를 중국어로 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계속>


<뉴스와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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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위빈이 유창혁을 꺾고 LG배 우승을 차지했다. 위빈은 5월10, 12일 롯데호텔에서 벌어진 결승 3, 4국에서 연거퍼 유창혁에 승리를 거두며 종합전적 3:1로 감격의 세계대회 첫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중국은 1995년 마샤오춘이 후지쓰배를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국제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위빈은 1967년생으로 마지막 4국 당시 첫 딸을 얻어 기쁨을 두배 했다.

유창혁은 LG배가 4회째 진행되는 동안 3번이나 결승에 진출해 모두 준우승에 그치는 불운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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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무서운 기세를 타고 있는 이상훈·이세돌 형제가 결전을 벌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재 29연승을 기록중인 불패소년 이세돌과 신인왕전에서 먼저 1승을 거두어 생애 첫 우승을 목전에 두고있는 이상훈이 신예 10걸전에서 각각 2연승으로 선두를 달려 우승컵을 놓고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 이 대회는 5명씩 두 개조로 나뉘어 각조 선두끼리 겨루어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인데 각조에서 2연승으로 선두를 달리는 형제는 어쩔 수 없이 우승컵을 놓고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

[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5/16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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