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가 삼개(麻浦)의 공덕리에 있었던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我笑亭:현재 동도 공업고등학교의 운동장).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갑오개혁 뒤의 일이다. 대원군의 문인들이 동학당을 사주, 서울에 진주시키고 대원군의 사손(嗣孫)인 이준용(李埈鎔)이 거느린 친영병으로 하여금 왕궁을 습격, 군주와 세자를 시해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각료를 살해한 뒤 이준용을 임금으로 받듣다는 음모설로 일대 옥사가 일어났다.

결국 이준용이 의금부에 갇히자 대원군은 “손자와 같이 옥에 갇히겠다”고 여러차례 의금부에 들어가려 시도했었다.

그러나 끝내 들어가지 못하자 금부의 정면에 있는 과실전 도가를 숙소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사건은 다섯 명에게 사형, 10명에게 종신형이 내려졌고 이준용은 고종의 육친이라는 이유로 강화 교동섬으로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이때 대원군도 공덕리에 있는 별장 아소정에 연금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대원군은 “손자가 갇힌 강화 교동으로 가겠다”고 현석포 강가로 나갔다. 50여명 되는 순검들도 묵묵히 그 가마 뒤를 따랐다. 강에는 이미 배가 마련되어 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원군이 가마에서 내려 나루로 걸어가자 재빨리 순검들이 배에 먼저 올라타 뱃사공 셋을 구금,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원군과 함께 온 하인 여덟 명도 인근 나루의 술집에 가두었다.

대원군은 외로이 나루에 서서 지나가는 배를 보며 목이 터져라 고함만 지르다가 결국 총검을 찬 순검들에게 망신만 당하고 도로 아소정으로 돌아오고 만다.

아소정에 연금상태가 된 대원군은 며칠동안 이 아소정의 문고리를 잡고 통곡하였다 한다. 늙은 정치가의 비참한 말로다.

이 비참한 ‘아소정의 노인’에게 명성황후 시해를 음모하고 있던 일본 작당패거리들이 찾아들었으니 명성황후 시해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는 대원군을 앞에 내세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음모가 제시되었을 때 대원군은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이미 늙어 근기가 없다. 이대로 죽어가는 것을 내 운명으로 알고 체념하고 있다.”

그러나 악랄한 일본 낭인과 깡패들은 명성황후 시해사변을 일으켰던 날 새벽에 대원군을 설득하려고 납치하기 위해 또다시 아소정에 몰려들었다.

당시 아소정을 나올 때의 광경을 그의 문인이 회고해 놓은 것을 보면 “한 소동이 갓을 씌우고 두루마기를 입히는데 당황해서 두루마기를 거꾸로 대주는 바람에 소매가 들어가지 않자 대원군은 쓴 웃음(辛笑)을 지으며 ‘너 역시 천하의 변천을 아는가. 어찌 너마저 거꾸로 나를 입히려 하느냐’고 했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의 을미사변에 능동적으로 개입했는지, 일본 세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는지는 그 그늘진 역사의 음모현장에서 쓴웃음짓던 대원군 대감의 아소정만이 알 일이다. 아소(我笑)라는 이름을 탓하랴!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0/05/1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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