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이 가져다 준 부작용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그 반대로 시너지 효과를 말하라면…. 글쎄요. 언뜻 생각이 나지 않네요.”

최근 만난 조흥은행의 한 직원은 합병 이후 달라진 직장 분위기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강원은행과의 합병이 이뤄진 후 이미 8개월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합병이라는 것이 정말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의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합병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품고 있다. 또다른 합병은행의 한 지점장은 “절반 가까운 인력이 빠져나가면서 업무과다에 시달리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직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며 “직원의 개인 생산성이 증가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눈가리고 아웅 식의 숫자 놀음일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 1998년 6월29일 동화, 대동, 동남, 경기, 충청 등 5개 은행의 퇴출을 신호탄으로 시작된 은행권 구조조정이 벌써 3년째를 맞고 있다.

이들 퇴출은행을 신한, 국민, 주택, 하나, 한미 등 5개 은행이 인수하고 상업-한일, 국민-장신, 하나-보람, 조흥-충북-강원 등 9개 은행의 합병이 이뤄지면서 은행권은 그동안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어왔다.

40%에 가까운 은행원이 직장을 떠났고 33개 은행 중 12개가 간판을 내렸다. 전국적으로 6,000개에 이르던 은행의 점포수도 5,000여개로 줄어들었다.


대형화추세 속 2차 구조조정 임박

그러나 은행권의 구조조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부는 ‘세계적 금융의 대형화·겸업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단서를 달고 합병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인터넷 환경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은행간 합병이 필수적이라는 보고서도 잇달아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5월10일 ‘인터넷 뱅킹 현황과 대응방안’이라는 내부자료를 통해 정보기술(IT)분야의 과잉투자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은행들이 인력감축 및 지점축소 등 구조조정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며 나아가 은행간 합병이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은행권에서 난무하고 있는 ‘짝짓기 시나리오’는 은행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실제 세계 은행산업의 판도는 최근 2~3년간 대규모 인수 합병 바람으로 크게 변해왔다. 이미 수년전 미국을 휩쓸었던 합병지진의 진앙지는 이제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합병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일의 금융전문 월간지 ‘디 방크’가 지난해 말 금융 컨설팅회사인 ‘베인 앤드 컴퍼니’의 조사보고서를 인용, 발표한 바에 따르면 1997년 말 이전에 세계적으로 추진된 주요 은행간 합병 사례 30건 중 성공적인 경우는 25%에 불과했으며 1998년 이후 이뤄진 20건의 합병도 주식시장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이어 1998년 이후 합병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최근에 성사된 합병의 경우 주가 동향을 분석한 결과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고 밝혔다.

특히 은행 합병의 결과가 부진한 이유에 대해 우선 사전 검토가 부족했으며 정치적인 고려에서 추진된 경우가 많았고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는 지나치게 강조된 반면 조직 통합상의 문제점이 간과된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은 우리로서도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다.


제무건전성 오히려 악화되기도

한빛은행의 한 임원은 ‘합병 은행이 운용상의 통합만을 집착한 나머지 효율적인 고객관리나 새로운 경영전략 수립 등 중요한 목표들을 등한시했고 그 결과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합병 이전보다 떨어진 은행 주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직원간의 화학적 융합, 사업부제와 연봉제에 따른 후유증 등이 치유되지 않는 한 국내에서도 합병 성공 사례를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합병은행인 조흥, 한빛은행 주식의 경우 지난 12일 현재 액면가에도 현저히 못미치는 각각 주당 1,960원, 1,375원에 거래됐다. 1년전 주당 1만원을 넘나들던 하나은행 역시 주당 5,890원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은행들의 실적을 보면 그 실망감은 더해진다. 국내 17개 일반은행은 1999년 한해동안 대손충당금 전입액 및 부실채권 매각손실을 제외한 경상영업부문에서 6조3,293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1998년의 2,091억원 적자와 비교해보면 6조5,000억원 이상이 개선된 셈이다.

그러나 비경상 영업부문은 11조3,202억원이나 적자를 내면서 오히려 1998년의 적자규모 10조8,492억원보다 손실금액이 늘었다. 새로운 자산건전성 분류방식(FLC)방식이 도입됐고 대우사태 등 외부 요인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천문학적 적자 규모에 대한 변명으로는 부족하다.

독자적이고 지속적인 수익원 개발로 꾸준한 실적을 지켜나가는 은행은 찾아 볼 수 없고 외부의 변수에 따라 흑자냐 적자냐가 판가름나는 취약한 수익구조를 여전히 개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제결제은행(BIS)비율도 17개 은행중 제일, 서울은행만이 큰 폭으로 상승했을 뿐 나머지 15개 은행은 오히려 지난해 6월말보다 하락, 재무건전성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뿌리다른 구성원, 융합에 어려움

은행의 실망스런 성적표는 합병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상당수 금융계 전문가들은 합병의 성공 여부를 논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지적하지만 현장에서의 목소리는 또다르다.

하나은행의 한 임원은 “합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이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을 뿐 더러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비관적으로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합병은행 직원의 화학적 융합 문제는 합병은행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지난해 1월 출범한 한빛은행의 경우 아직까지도 두 개의 노조가 존재한 채 좀처럼 통합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은행권으로서는 최근 다시 불고 있는 짝짓기 바람에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다. 한 대형 시중은행 노조위원장의 말은 냄비처럼 끓고 있는 합병론을 차분히 돌아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제 합병만이 구조조정의 전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합병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초심으로 돌아가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할 때다.”

이승형 문화일보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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