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적극적인 파병의지, 경제적 이익이 최대 목표

“자발적으로 지원한 전역군인을 보내겠다.” 베트남 파병이 실행되기 직전인 1964년 3월 총리를 역임한 김현철(이후 주미대사)씨는 사무엘 버거 주한 미대사가 “전투병 참전은 한국의 유엔 가입에 장애가 된다”며 난색을 표하자 이같이 대안을 제시했다.

미 국무부가 비밀해제한 대화록에서 확인된 이 내용은 당시 한국 정부가 참전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단에 불과하다.

‘민병대 파병’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1967~1968년 국군의 4차 파병 때까지 심각하게 논의됐다.

박정희 정권은 왜 전투서열 1순위인 정예부대를 베트남에 보냈을까. 북한의 위협이 두렵지도 않았는가. 국군 파병은 미국의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가.

최근 공개된 미국 문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경제적 이익의 차원에서 집요하게 참전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미국이 확신한 한반도 안전

한국은 당시 북한으로부터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지만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해도 괜찮을, ‘안전한 나라’였다. “미국은 북괴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비무장지대에 배치된 핵무기들을 추가배치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미 국가안보위 소속의 한국 조사팀이 1965년 6월5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보고서는 주한미군의 핵보유 사실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군사력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백악관 안보담당 수석보좌관실 소속 아시아 조사팀이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작성한 ‘박대통령 방미관련 요약보고:한국의 군사력과 군사원조계획’이라는 보고서에서도 “한미 양국의 합동 군사력은 북한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보다 월등히 우수하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병력이 다소 감축된다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 뿐 아니라 당시 한국 정부도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안보 공백’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국의 파병을 자신했던 백악관

당초 미국은 요구만 하면 한국군 파병이 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1964년 12월19일 주한 미대사관이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는 박 대통령이 버거 대사에게 “한국은 이미 2개 사단을 파견해 전쟁을 수행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상기했다”고 밝혔다.

1964년 12월8일 미 국무부가 작성한 ‘제3국의 베트남전 지원상황’이라는 대통령 보고에서도 러스크는 “단지 남은 문제는 우리(미국)가 지불해야할 대가의 결정만 남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이 제2차 비전투요원 증파를 위한 협상을 앞둔 시점인 1964년 12월24일 백악관 동아시아 담당관인 체스터 쿠퍼는 안보수석인 윌리엄 번디에게 보고한 문서에서 “우리는 기아문제로 고민하는 한국에 작은 성탄절 선물로 곡물원조(PL-480)의 조기 집행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한국군의 파병을 당연시여긴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작전계획을 만들었다. 1965년 4월6일 존슨 대통령은 같은해 10월까지 미군 15만명의 파병과 한국군 2만1,000명의 파견을 핵으로 한 작전계획 ‘NSAM 328’에 서명했다.


비싸지는 파병의 대가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곧이곧대로 수용하는 녹록한 존재는 아니었다. 1965년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지도자는 종래의 적극적인 파병외교에서 한걸음 물러선다.

이는 한일 외교정상화에 따라 일본에 요구한 청구금과 융자금을 합친 8억달러의 자금이 확보돼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이 다소 용이해진데다 한국이 미국에 대해 갖게된 흥정의 위치(Bargaining Position)를 인식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965년 4월2일자 ‘국무성 대화록’을 보면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 국무차관에게 “한국이 잘 교육된 인력을 후진국에 진출시켜 실업률을 낮추려는 계획에 미국이 지원해줄 것”을 공식요청했다. 한국측의 전쟁특수에 대한 관심도 같은 시기에 미국측에 전달된다.

1965년 2월7일 국무성이 주한 미대사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김 대사는 러스크에게 한국이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경제특수를 이루는데 미국측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다.


당황한 존슨

한국이 참전을 계기로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전쟁특수를 극대화하려는 노골적인 의사표명은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가진 회담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미한관계’라는 제하의 백악관 대화기록(1965년 5월18일)에 따르면 존슨이 “1개 사단을 파병해주면 전쟁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파병을 요청하자 박정희는 “개인적으로는 파병을 원하지만 이런 문제는 정책 책임자의 검토에 의해 결정될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미 파병을 결정한 박정희가 이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측으부터 최대한 양보를 얻어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석다조의 참전

한국의 미지근한 태도에 당황한 미국은 원조국(AID)이 대한(對韓)지원 규모를 재조정하는 등 경제 지원에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1965년 12월22일의 AID 발신-미 대통령 수신으로 된 전문은 이른바 ‘대한 개발융자’패키지의 내용을 밝히고 있다.

“첫째는 서울 화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2,250만달러, 둘째는 서울의 수도시설 확장자금 3,706만달러, 마지막으로 현대시멘트 공장 설립 지원을 위한 300만달러” 등이다.

특히 AID는 대통령 보고에서 “박 대통령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 융자금의 지원이 올해내에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경제원조 다짐을 계기로 미국은 험프리 부통령을 한국에 급파, 제2차 전투병력 파병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1966년 1월1일자 주한 미국대사관의 전문에 따르면 정일권 총리는 험프리에게 “한국은 더많은 병력을 파병할 의향이 있는데 과연 미국은 건설 등 베트남 특수사업에 우리의 전적인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험프리는 미국 대통령 보고에서 “한국 지도자들은 일석다조(一石多鳥)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공산주의와의 승리 만큼 경제적 이익도 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보고를 받은 존슨 대통령은 미국의 전쟁확대 계획의 실행을 위해 절실했던 한국군 확보를 위해 한국측이 제시한 거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당시 미국은 유엔의 지지는 물론이고 전통적인 우방의 도움을 얻는데도 실패한 상황이었다.

존슨은 안보수석인 번디가 제의한 ‘한국군 파병을 위한 감미료’(Sweetener for another ROK division in Vietnam)라는 보고서에 사인했다. 존슨은 이어 1968년 12월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호주 총리의 장례식에서 박정희를 만나 “경부고속도로의 완성을 위해 미국은 완벽한 재정지원계획을 갖고 있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약속하기에 이른다.


정전 반대와 민병대 파병요구

그러나 한국의 요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은 1967년 중반 미월간의 화해무드가 조성돼 파병을 재고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박정희는 민병대 파병을 고집했다.

이같은 사실은 1966년 미 국방장관이 김성은 국방장관의 방미 결과를 태평양 지역 사령관에서 설명하는 전문에서 확인된다. 김 장관은 퇴역군인의 파병과 이들이 자체적으로 미군과 한국군의 보호를 받으며 작전지역과 작전권을 할당받아 활동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한국은 또 미국의 정전(停戰) 정책을 공식 반대했다.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파견됐던 클리포드 테일러 장군은 미 대통령에게 “한국은 지금도 추가파병을 원하고 있으며 전혀 확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1966년 1월5일 이동원 외무장관은 “한국은 베트콩의 위장된 전술적 퇴각을 돕는 어떠한 평화안도 반대한다”면서 미국의 북폭중단에 대한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같은 한국정부의 강경자세와 미국 좌파들이 제기한 한국군의 잔혹행위 등으로 한국은 국제적인 선무공작의 대상이 돼야 했다.


집요한 추가 파병 요구

한국은 미국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파병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성은 국방장관은 1968년 12월18일 주한 미대관을 통해 웨스코얼랜드 장군에게 2개 여단을 포함한 총병력 1만1,000명의 ‘축소여단’을 파병하겠다고 통보했다.

군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얻기 위해 한국은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1968년 1·21 사태가 발발한 후 한국은 주한 유엔군 사령부를 통해 “베트남의 한국군 전원을 조기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미국은 이같은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외교채널을 동원, 한국의 입을 막아야 했다.


월남 최대 병력을 보유한 한국군

1968년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의 탈아시아정책이 추진되면서 베트남의 미군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태국의 경우 1969년 여름 자발적으로 미국에 회담을 요청, 태국내 미군철수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한국은 1969년 이후 4만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 베트남 최대의 외국군으로 남아있었다. 당시 미군은 2만~3만명 수준이었다. 이는 시종일관 경제적 이득을 최우선시했던 한국 정부의 의지의 발현이었다.

결국 한국은 전투병 파견을 통해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 획득과 군현대화 등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파병과정을 통한 미국과의 끈질긴 협상은 6·25 이후 지속돼온 대미일변도 정책, 즉 미국이 가는 길에는 무조건 동참하는 것이 최선의 이익(Allthe Way with the America)이라는 인식을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이 32만명의 병력을 파병, 중국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들과 전쟁을 하고 있을 때 한국 지도자들은 미국으로부터 미·중 화해에 관해 결코 사전통보를 받지 못했으며, 미 제7사단의 한국 철수도 한국측의 동의없이 실행됐다.


베트남·이동준 국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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