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이지만 지상을 누빈다. 군인이지만 악기가 무기다. 33년간 타악기만 두드리며 음악의 한 고지를 점령해온 해군 군악대의 노장, 박철원(53) 원사.

군악대 연습실에서 한시간 이상이나 온갖 이상한 악기를 꺼내 두드려 보이고도 곧 사무실의 자기 자리로 돌아오자 또다시 책상위에 뒹굴고 있던 드라이버를 들고 주위의 물컵이며 재떨이를 두드리며 돌아다닌다.

“무엇이든 같은 소리는 없습니다. 다같은 놋그릇도 그릇마다 다른 소리가 납니다. 어디를 두드리는지, 치는 위치나 손의 힘에 따라 소리의 성질이며 깊이와 그 여운까지 모두가 다르죠.”

소리나는 것은 무엇이든 그에게 악기다. 드럼이나 북, 심벌즈 등 우리가 알고 있는 타악기 연주는 기본 메뉴. 그 악기들을 곧이곧대로만 쓰는 것도 싱겁다. 새로운 소리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시도해본다.

실로폰처럼 두드리며 연주하는 마림바를 바이올린처럼 켜기도 하고, 심벌즈 한쪽을 팀파니 위에 올려놓고 말렛으로 자근자근 두들기며 묘한 복합음을 들려주기도 한다.

최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비롯, 전국 순회공연을 가졌던 정기연주회에서도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구한 브레이크 드럼을 들고 나왔다. 그쯤 되면 타악이면서도 반쯤은 퍼포먼스다.


3군 통틀어 최고참 현역연주자

육·해·공 3군을 통틀어 최고참 현역연주자이기도 한 그는 직접 만들어낸 소리만도 수백가지에 이른다.

일반인이라면 평생 한번 볼까말까 한 외국의 희귀 타악기도 책만 보고 직접 제작해낸 것이 여러 점. 긴 호루라기 모양의 ‘송휘슬’, 철제 삼각뿔 모양의 ‘어고고벨’ 등은 1970년대부터 그가 대장간이나 철공소, 목공소를 뛰어다니며 만든 수제품이다.

라디오나 만화영화 등에서 자주 쓰이는 특수 음향효과도 그의 특기중 하나. 재료도 간단하다. 콩 한줌과 큰 북만 있으면 파도소리도 만들어내고, 함석판 하나면 번개나 천둥소리까지 갖가지로 쏟아낸다.

총소리를 내는 ‘팝건’이나 바람소리를 내는 ‘윈드머신’, 정박한 배들끼리 부딪치는 마찰음을 내는 ‘스트링드럼’ 등도 그가 개발한 신종 악기다. 샌드페이퍼 한장으로도 몇가지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에게 “새로 개발한 소리가 몇가지쯤 되느냐”고 묻는 건 그래서 우문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시간만 주면 그는 ‘음악사전에도 없는 소리’를 얼마든 조합해 들고 올 것이므로.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해군이 ‘살인적 인기’를 누리던 1967년에 입대, 지금까지 해군 군악대에 몸담아왔다.

입대시 경쟁만해도 20대1에 육박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은 중학시절부터 축적한 연주실력 덕분이었는데 1961년 서울 배명중에 입학하면서 입학식장에 나온 학교 밴드부에 반해 곧바로 입단, 드럼을 배운 것이 타악연주를 시작한 계기였다.

그때까진 어렸을 적 부친이 틀어주던 유성기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거나 1950년대경 손목인씨와 함께 음악을 했던 무명 재즈가수 삼촌이 있었다는 정도의 기억이 고작인, 음악의 문외한이었다.


한때는 고교브라스밴드가 최고 인기

학생 밴드부라곤 해도 연습의 강도며 활동량은 기성세대 못지 않았던 중학교 시절, 이미 그때 준(準)군대생활을 맛보기도 했다.

“당시엔 학생 밴드부의 군기가 군대 못지 않았습니다. 선배들이 어찌나 엄한지 한번 입단하면 나가는 것도 마음대로 못했습니다. 실력이 떨어져 자체적으로 내보내는 경우를 제외하곤 누군가 나가겠다고만 하면 선배들이 70-80대씩 매를 때리거나 기합을 주며 막았습니다.

오후 4시 수업만 마치면 그때부터 밤 9시까지 매일 맹연습인데, 집에선 그거 배워서 딴따라밖에 더 되냐고 부모님이 아주 심하게 반대하셨죠. 저 말고도 당시 부원들 열명중 여덟, 아홉명은 그렇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온 친구들이었어요. 정말 자기가 좋아서 오는 골수들이었지요.”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당시는 중고등학교 브라스밴드가 최고의 황금기를 누릴 때였다.

서울 시내에만 약 40여개 밴드부가 있었는데 학교마다 우수자원을 확보하기위해 전액, 반액 장학금 혜택까지 걸어가며 부원들을 스카웃해갔다. 박씨도 고교입학 무렵 집안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전액 학비면제 특기장학생의 제의를 받고 고교에 진학, 밴드부 활동을 계속하게 됐다.

고교 졸업후 해군을 택한 것은 당시 해군의 인기도 인기지만 이곳에 올 경우 일반 음악대학 못지않은 전문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국내외 유명 강사진으로 구성된 전문교육을 받는 등 남다른 교육과 지원을 받았다. 자신뿐 아니라 해군군악대 전체의 실력은 그가 힘주어 강조하는 부분.

특히 일반 타악인협회나 타악기를 전공한 교수들이 어쩌다 한번씩 소극장을 빌어 이따금 선보이는데 불과한 타악기 앙상블을, 이들은 1970년대부터 대규모 정기공연으로 편성, 해마다 공연하고 있는 유일한 연주단이다.

따라서 해군군악대에 대한 그와 단원들의 자부심은 더욱 대단할 수 밖에 없다. 때로는 다른 연주단 앞에서도 “우리만한 군악대 있으면 나와보라”고 호기있게 큰소리도 치는 그지만, 속으로야 어쨌든 면전에선 단한번도 공박을 당해보지 않았을만큼 실제로도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파이기도 하다.


입대 뒤에도 피밀리는 실력경쟁

“왜냐면 입대한 뒤에도 우리만큼 피말리는 실력경쟁을 하는 곳도 드물거든요. 환경 자체가 꾸준히 자기발전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돼 있습니다. 실력이 없으면 계급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절대 진급도 없습니다.

진급도 실기평가를 통해서 이뤄지는데 해마다 간부진 앞에서 연주를 하고 여기서 실력이 발전된 게 입증되지 않으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가차없이 제자리입니다. 수석파트 자리에 누가 앉는가 하는 것도 보통 신경이 마르는게 아닙니다.

다른 곳에선 이럴 때 연륜을 중시해서 고참을 대접해 수석에 앉혀주는 게 보통이지만 해군군악대는 아무리 새파란 부하사병이라도 실력이 선배보다 나으면 곧바로 수석으로 앉혀버리거든요. 오직 ‘추월하느냐, 추월당하느냐’ 둘 중 하나죠. 그런 환경에서 버티고 살아남자면 죽도록 연습할 수 밖에요. 그러니 대원 전체의 실력이 최고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전 지금까지 선배를 추월하긴 해보았어도 추월당해보진 않았지만 내일 아침이라도 혹 누가 당장 제 앞을 가로지를지, 후배한테 망신 안당하려고 요즘도 하루 몇시간씩 연습합니다.”

요즘처럼 수입자유화가 되기 전엔 악기를 구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1970년대만 해도 드럼 스틱 하나 제대로 된 국산이 없었을 때니 다른 타악기야 말할 것도 없었다.

군악대원 중에서도 최고의 정예를 가려 내보내는 해외 순방공연 때도 연주가 끝난 뒤 시간만 비면 관광 대신 악기를 구하러 다녔던 박씨. 제작비용을 줄이기위해 근처 건축공사장에서 파이프를 주워다 쓰는 등 주변의 물건을 재활용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가 현지조달한 악기 중 가장 압권은 지금까지도 요긴하게 쓰고 있는 여러 크기의 종들. 경기도 양평의 한 의용소방대 건물에 달려있다가 느닷없이 입양(?)돼 온 종도 있고, 버려진 폐선에서 눈에 띄어 실려온 종도 있다.

심지어 미군 장교클럽에 달려있던 골든벨까지 주인을 설득해가며 기어이 얻어온, 박씨 이하 무적의 군악대 용사들. 종을 만들자면 주물 틀에 들어가는 제작비도 건지기 어려운 터라 궁리끝에 짜낸 비상조달작전이었다.


간판보다는 실력으로 인정받는곳

“애초엔 의무 복무기간만 마치고 제대할 생각이었는데 제대무렵 ‘음악감독제’라는 게 새로 생겨서 4년제 정규음대 졸업장이 없으면 사회에선 일반 교향악단 어디에도 발을 붙일수 없게 됐습니다. 아무리 오랜 연주경력이나 실력을 갖고 있어도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받아주지도 않을 뿐더러 이미 활동하고 있던 분들까지 나오게 된 겁니다.

정말 실력있던 연주자 상당수가 그때 밖으로 나왔지요. 학벌만 내세우는 사회에 나가서 어렵게 사느니 차라리 학벌 차별도 없고 원하는 음악을 다양하게 해볼 수 있는 군이 더 나을 것 같아 1974년 결심을 굳혔습니다.

물론 군악대 내에서도 대졸자들이야 많지만 여기선 간판보다 실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니까. 학력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33년이 지난 오늘, 그는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현명했는가를 절감한다. 외국유학 등 화려한 학력과 연주경력을 갖고도 좁디좁은 국내 음악시장에서 자리를 찾지못해 어려움을 겪거나 수시로 ‘팽’당하는 비슷한 연배의 연주자들을 보면 안타까움과 함께 자신의 길에 대한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낀다. 생각보다 오래 마음의 상처를 남겼던 학위문제도 오래전에 극복했다.

생활의 질에서든, 행복의 질에서든 그는 누구 못지않은 넉넉한 ‘말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는 연주자 체질인가 봅니다. 1995년부터 작년까지 4년동안 해군 교육사령부 군악대장으로 있었는데 말하자면 직접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휘자 생활을 한거죠.

하지만 그때 더욱 확실히 느낀 것이, 지휘도 나름대로 아주 성취감이 높고 보람있는 일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직접 연주하는 것보다 재미가 못하더란겁니다.”

멋진 해군 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재미도 3년뒤면 끝이다. 그러나 정년퇴임을 한 뒤라도 그의 노후는 그리 한가하지 않을 것이다. 은퇴 후에도 타악기연구소를 열어 음악활동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경기 오산에 있는 한 후견인이 연구소 부지 등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한 상태. 맥아더가 설파한 명언이지만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무대만 바꿀 뿐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0/05/18 19:3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