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잊지말자 1950년 6월 12~14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전야. 김대중 대통령은 “남이 갈라놓은 55년의 분단, 긴장 등을 이제 우리 스스로 극복하고 민족사에 평화를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로 남북 정상들이 만나게 됐으면 진전이 있을 것이다”는 소감을 털어놨다.

‘우리 스스로’, ‘민족사’, ‘진전이 있을 것’등은 김 대통령이 자주 쓰지 않는 말로 이번 회담의 역사성과 자주성을 말해준다.

어쨋든 서울에 ‘평양을 뜨게 한’신장 163cm, 80kg의 고수머리, 모택동식 간편복 차림의 올빼미 눈같은 검은 안경을 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직도미스터리 상태다.

그러나 그는 1950년 6월 13일~15일 전후의 북한과 그후 50년이 지난 2000년 6월 중순, 정상회담을 갖는 민족사적 의미를 잊지말아야 한다. 1950년 6월13일은 북한에서 무슨 날일까. 북한문제 권위자인 도쿄대학 명예교수인 와다 하루키 박사의 ‘한국전쟁’(1935년 출간)에 따르면 이날은 북한의 7개 사단이 38선 지대로 이동, 23일까지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24일에 공격 명령이 내리기로 결정된 6·25전쟁 D-12일이다.

6월 13일 전후의 군대 이동에 앞서 스탈린은 1950년 4월 10일 김일성 박헌영과의 비밀 3자회담에서 3단계 공격계획을 제시했다.

제1단계는 38선 부근으로의 병력 집결. 제2단계는 평화통일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되 상대가 분명히 거절하도록 만들고, 3단계로 기습공격을 해서 옹진반도부터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참전하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탈린의 지시대로 북측으로부터 위장 평화공세가 펼쳐졌다. 1950년 6월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북 총선거를 제안하며 대표 2명, 기자 1명을 38선 개성 부근 여현으로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조통’은 그러나 이승만, 조병옥 등 9명의 ‘매국노’는 새 총선에 출마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아 ‘거절할 수밖에 없는 평화제의’를 남측에 냈다. 뒤이어 북한 대표들의 체포및 귀순발표가 나오자 16일에는 김삼룡, 이주하 등을 조만식과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며 19일로 예정된 제2대 국회개원을 앞두고 17일 남북 총선을 제의했다.

6·25때 평양에서 압류된 숱한 북한군 문서의 추적 결과, 이미 이런 평화제의전에 전 인민군을 대상으로 6월3일 군인선거가 실시되었고 전시정치문화사업이란 ‘남진계획서’가 전 사단에 대대단위로 이미 배포된 상태였다.

남침 공격 준비 완료일인 6월 23일 김두봉 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남한 국회는 권한이 전혀 없어 우리(북한)의 제의를 해결할 능력도 없고,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것 같지도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개성 전선으로 이동 배치를 완료한 인민군 6사단 장교들에게는 “‘조국전선’의 호소를 남조선이 거부하니 이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훈화했다. 온건노선으로 알려졌던 김두봉마저 평화통일제안이 위장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키 교수는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을 저술한 세계적인 김일성 연구가다. 특히 러시아에 정통한 그는 최근에 비밀해제된 스탈린과 김일성, 마오쩌둥 등 3인간에 오간 6·25관련 서신과 명령서 등을 통해 지금까지 추측속에 남아있던 사실들을 객관화시켰다.

김일성은 1950년 8월 북한군이 하순 낙동강 전선에서 발이 묶이고 미군 2개 사단이 도착한다는 정보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한탄했다고 슈치코프 북한주재 소련대사는 전했다. “상담할 상대도 없다. 부수상들도 돕지 않으며 그네들이 일하는 태도도 변변치 못하다.

박헌영은 신뢰할 수 있지만 업무에는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다. 또 그 스스로 문제를 처리 할 수도 없다. 뭔가를 맡기면 그것을 바로 부하에게 돌려버린다. 어려운 문제를 상담해도 자신의 의견은 말하지 않고 내가 뭔가 말하면 무엇이든 동의한다”고 그는 호소했다.

슈치코프가 본 김일성의 모습은 어떤가. “열심히 일하며 업무에도 애를 쓰고 있다. 군사부문에 전념하여 중요하고 절실한 민생문제를 뒤로 돌리고 있는데 그의 업무처리 방식에 경험 부족과 미숙함이 느껴진다. 우리(소련)는 가능한 한 그를 지원하려고 한다.”

김일성은 8월31일 스탈린 앞으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감사문을 보냈다. 내용은 “…당신의 어버이 같은 배려와 원조를 감사히 여깁니다”였다. 그러나 이 ‘어버이’를 부추겨 일으킨 전쟁으로 인민군 52만여명, 총 200만여명의 인민이 실종되거나 사망했다. 6·25 발발 50주년 전야에 김정일은 무력이나 위장평화가 평화나 통일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음미해야 한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입력시간 2000/06/1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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