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11)] 고흥(中)

임진왜란과 덤벙분청 찻그릇

16세기 후반 조선을 포함한 동북 아시아의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포르투갈인의 일본 도래(到來)의 충격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한 조선침략은 동북 아시아의 기본 밸런스를 크게 파괴했을 뿐 아니라 평화스런 조선을 7년동안 황폐하게 만들었다.

또한 유교 문화권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개입함으로써 국력이 크게 쇠잔되어 마침내는 북방민족인 청나라에 굴복하게 된다. 임진왜란의 대참화 속에서 조선과 일본은 문화적인 대이동을 겪게 된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조선 도자기 문화가 상당수 일본으로 넘어가고 조선에서는 영영 사라져버린 것도 있었다. 비록 전시라도 어떤 문화가 전파돼 나가고 자기 고향에서는 글자 그대로 말라버리는 일은 동서고금에 전례가 흔치 않다.

토요토미와 그의 다이묘(大名)들에 의해 주도된 임진왜란은 문화적으로는 찻그릇 약탈전쟁이였으며 또한 일본 도자기 문화에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7년동안의 전쟁 격랑 속에서 유독 우리나라 남도지역의 많은 가마터에서 구워진 찻그릇과 사기장인이 대량으로 약탈, 납치되어 간 것은 이미 임란전에 큐슈(九州)지역의 다이묘(大名)들이 쓰시마한(對馬島藩)을 통해 조선의 유명한 찻그릇 가마터에 대한 리스트를 미리 입수했고 또한 일본군이 남부지방에 장기간 주둔했기 때문이다.

고흥 운대리 덩벙분청 찻그릇 가마터와 가장 가까운 전남 순천 동남방 10Km 지점에 임란때 일본군이 축성한 성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정식 명칭은 승주신성리성(昇州新城里城)이다.

순천에서 여수로 조금 가다보면 월전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완만한 구릉이 나오고 그곳을 넘어서면 앞이 확 트이면서 옹기종기 크고 작은 섬이 그림같이 떠있고 눈 앞에 왜군이 축성한 왜성대가 젖꼭지처럼 돌출하고 있다.

경남 웅천의 왜성같이 험한 지형은 아니지만 왜군이 장기간 농성하기에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왜성이 완성된 것은 1597년 12월2일. 카톨릭 영세자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 1만3,700명이 여기에서 함선을 감추어 놓고 최후의 농성을 했던 것이다. 순천 왜성에서 덤벙분청 찻그릇을 굽던 고흥 가마터는 이곳에서 불과 50Km 이내였다.

임란이 끝날 당시 조·명(朝·明) 연합군(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제독 진린이 지휘한 맘모스 함대)와 고니시 군과의 최후의 치열한 전투를 명나라 종군화가가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순천 왜성 전투도와 노량해전 전투도(이순신장군은 노량 관음포해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가 미국 콜럼비아대학교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1979년 4월11일자 일본 산케이신문 보도를 통해서 기행자도 처음으로 접했다.

이 전투도의 발견으로 한·중·일 학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토요토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본군 마지막 부대가 우리나라를 떠난 것은 1598년 11월26일. 이로써 7년간의 전쟁은 끝났지만 한·일 양국 중 특히 한국이 입은 상처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남아있다.

조선 남부지방의 뛰어난 사기장인은 이산의 아픔과 통한을 남기면서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 일본으로 끌려갔다.

조선의 덩벙분청 찻그릇을 너무나도 좋아했던 비운의 장수 고니시는 43세를 일기로 1600년 9월 운명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토쿠가와 에이야스(德川家康)군에 패한 후 조선에서 저질렀던 온갖 만행을 참회하면서 그가 그렇게 신봉하던 그리스도의 곁으로 가야만 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지만 그가 좀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훌륭한 테크노크래트가 되어 한·일간의 외교에 많은 공헌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6/1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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