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세상읽기] 영화와 현실의 시간

시간은 차별이 없다. 어느 곳, 어디서나 1초는 같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간을 자유로이 변형한다. 1초 동안에 벌어지는 일을 수십분 동안 펼칠 수도 있고, 몇 광년을 1초에 표현할 수도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노스텔지어’는 마지막 주인공이 웅덩이에서 촛불의식을 행하는 시간을 현실의 시간과 갖게 했다.

영화에서 시간은 제맘대로다. 대부분 현실보다 영화속 시간은 빠르다. 시간과 장소를 건너뛰거나 축약하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2시간 동안 수십년의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그러나 영화속의 시간도 시대에 따라 그 흐름을 달리 한다. 과거 순차적이고 완만한 흐름이 현대에 와서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바쁘다.

올 여름 블록버스터들은 그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고대 로마시대 검투사의 이야기를 다룬 ‘글래디에이터’에서 시간은 처절하고 비감할 정도로 느리다. 그 긴 시간을 마치 한걸음 한걸음 옮기듯 주인공은 복수를 위해 매일 죽음의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영화는 그렇게 긴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 2’나 ‘식스티 세컨즈’는 20시간, 24시간만을 허용한다. 그 안에 치명적 바이러스를 회수하고, 치료약을 구하지 못하면 사랑하는 여자나 동생이 죽는다.

주인공들은 적이 설정한 시간의 노예가 된다. 영화는 그 시간의 노예들이 정신없이 뛰고 달리면서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을 급박하게 카메라를 움직이고, 특수효과를 쓰면서까지 스릴을 과장해 보여준다. 잊을만 하면 관객에게 중간중간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친절까지 베풀면서.

현대인은 영화를 보면서도 시간이 느린 듯한 것을 참지 못한다. 정신없이 변하는 영상에서 짧은 시간 많은 것을 얻은 듯한 만족을 느낀다. 토막난 시간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조차 오락이다.

미래까지 끌어들이면 영화는 시간의 개념을 아예 뒤집어버린다. 미래와 현재, 현재와 과거가 한 공간 안에 공존하기도 하고 시간의 순차성도 무시된다. ‘터미네이터’의 미래에서 현재로의 역행이나, ‘비지터’의 현재에서 과거로의 역행 같은 것은 이제 익숙하다.

‘배틀 필드’는 1,000년 후의 미래에는 단 몇 초에 인간이 수억 광년 떨어진 행성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트로엑티브’나 ‘오스틴 파워’에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인간이 과거를 다시 만든다.

한국 영화도 이제 시간을 쪼개고 뒤섞을 줄 안다. ‘박하사탕’은 과거시간을 단순한 플래시백(회상)이 아닌, 기차가 뒤로 가듯 역행시켰다. ‘동감’은 1979년과 2000년을 한 공간에 두었다. ‘실제 상황’은 완벽하게 영화 속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했다.

왜 영화가 이런 시도를 할까. 물론 일차적인 목적은 상업성이다. 오락물은 상식을 깨는 시간의 설정으로 스릴과 액션을 추구한다. 멜로는 더 애틋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리얼리즘 영화는 새로운 형식으로 보편적인 주제를 새롭게 보이도록 한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보면 절대 불변이다. 과거의 1초는 느리고, 지금의 1초는 빠른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그렇게 생각한다. 분단 55년보다 남북 정상회담이 연기된 하루가 더 길었다는 어느 장관의 이야기처럼. 시간은 때론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대현 문화부 차장

입력시간 2000/06/2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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