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낭자군단 '코리아 돌풍' 예고

지구가 일정한 자전과 공전 사이클로 우주를 유영하듯, 인간도 보이지는 않지만 일정한 신체 리듬을 탄다. 이유 없이 힘이 없거나 짜증이 나고, 어떤 땐 자신도 모르는 에네르기가 솟아나는 것도 바로 이런 인체의 사이클과 관계가 깊다.

그 리듬은 짧게는 몇 분, 몇 시간, 또는 하루 단위로, 길게는 1주일에서 1년, 10년 등의 다양한 주기로 나타난다. 이런 인체 사이클에 가장 민감한 운동이 바로 골프다. 골프는 인간의 심리적 요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인체가 스스로 인식하는 생체 사이클에 따라 경기력의 차이가 확연히 난다.

바로 전날 언더파를 치며 선두로 나섰던 톱프로들이 불과 하룻만에 아마추어나 다름 없는 형편없는 스코어를 치며 컷오프에서 탈락하는 것도 바로 골프가 갖는 이런 마력 때문이다. 내노라하는 미국 프로골프협회(PGA)의 톱프로들 조차 샷에 앞서 손목을 한두번 움직이거나 그립을 잡았다 풀었다 하는 식의 자신만의 루틴(습관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자신의 심리적·육체적 리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다. 그래서 골프는 흔히 ‘리듬과 템포의 스포츠’라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다

현재 세계 최정상의 무대 미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는 10명에 가까운 한국 낭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고 있다.

물론 LPGA투어 전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풀시드권을 갖고 있는 선수는 1998년과 1999년 미 LPGA 신인왕 출신인 박세리(23·아스트라)와 김미현(23·n016-한별), 지난 시즌 2부 리그 퓨처스투어에서 종합우승해 자격을 얻은 ‘수퍼 루키’ 박지은(21), 그리고 신예인 ‘코알라’ 박희정(20)과 노장 펄신(33·랭스필드) 등 5명이다.

나머지 선수들은 대회마다 예선전을 치르거나, 출전 대기 명단에 올려져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있다. 1998년 박세리의 미국 진출 이후 가장 많은 인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올시즌 중간 반환점을 눈 앞에 두고 있는 6월15일 현재까지 이들 코리아 낭자군단이 거둔 성적은 단 1승. 간판 스타 박세리는 9개 대회에 출전해 톱10 진입은 단 3번으로 상금 랭킹 41위(10만2,088달러)에 머물러 있다.

김미현도 12개 대회에서 톱10에 단 3회 올라 상금 랭킹 32위(12만5,498달러)에 랭크돼 있다. 신인인 박지은만이 6월 첫날 열린 캐시아일랜드 그린스닷컴 LPGA 클래식서 프로 첫승을 올리며 상금 랭킹 22위(16만4,323달러)를 기록, 한국 선수중 유일하게 상금 랭킹 30위권 내에 들어 있다.

올시즌 초 전미 아마추어 챔피언인 박지은의 가세로 단숨에 애니카 소렌스탐과 캐리 웹 등이 주도하는 유럽과 호주 세를 밀어내고 미 LPGA투어에 ‘코리아 돌풍’을 일으킬 것 같았던 기세가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국내외 골프 전문가들은 6월을 출발점으로 해서 코리아 낭자들의 그린 돌풍이 거세게 몰아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근거는 인체 사이클. 박세리와 김미현은 훈련 여건이 열악한 국내에서 골프를 시작, 10년 넘게 한국적 골프 스타일에 길들여져 있다.

이들은 잔디가 없는 한 겨울에는 주로 동계 체력 훈련을 하고 잔디가 자라는 늦봄부터 실제 라운딩에 들어간다. 제주도를 제외한 국내 골프장에서 페어웨이 잔디가 제대로 자라는 때는 대략 5월말에서 6월초.


6월 이후부터 상승세

따라서 아마추어는 물론이고 국내 프로들이 일년동안 본격적인 샷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때는 예외없이 6월 중순부터다. 박세리의 경우도 미국 진출 이후 2년 동안 통산 8승을 거두었는데 이중 7승이 여름이 시작되는 6월 이후에 올렸다.

‘수퍼 땅콩’김미현도 지난해 2승을 모두 하반기에 거두었다. 현재 ‘올해의 루키’ 부분에서 단독 1위를 달리고 있는 박지은 역시 시즌 초반 “고등학교 때나 애리조나 주립대 재학 시절 항상 6월부터 경기에 출전하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 좋은 성적을 기대 해도 좋다”고 줄곧 말해왔다.

박지은은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5월말까지 톱10 진입 단 1회에 그치다 6월 첫날 벌어진 대회에서 우승컵을 차지했다.

고려대 체육교육과의 박영민 교수는 “같은 나무라도 지역에 따라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다르듯 골퍼들도 각자의 특성에 따라 제 실력을 발휘하는 시기가 다르다”며 “한국 골퍼의 경우 특히 잔디가 나는 여름부터 본격적인 샷 감각을 찾기 때문에 후반기가 되면 좋은 성적을 올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박세리와 김미현은 18일 프랑스 에비앙의 로열GC(파72)에서 끝난 미 LPGA투어 에비앙마스터스(총상금 180만달러)에서 나란히 올시즌 최고 성적과 타이인 공동 5위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22일(현지시간) 미 델라웨어 윌밍턴의 듀퐁CC에서 벌어지는 올시즌 두번째 메이저 타이틀 대회인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이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특히 이 대회는 박세리가 데뷔 첫 해인 1998년 미 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로는 남녀를 통틀어 첫 메이저 타이틀이자 첫 우승을 기록한 대회이기 때문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 대회 우승으로 자신감을 얻은 박세리는 이후 6월부터 3승을 차지하며 무서운 상승곡선을 탄 바 있다.

박세리는 스캔들로 시달렸던 지난해와 달리 현재 심리적으로 어느 때보다 안정돼 있다. 예년과 달리 올해에는 6월 중순까지 단 10개 대회에만 출전, 체력을 상당히 비축해 놓은 상태라 이번 맥도널드 LPGA 챔피언에 거는 기대는 그 어느 때 보다 크다.


심리적·체력적으로 안정세

‘수퍼 땅콩’ 김미현은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정신적으로 다소 지친 감이 없지 않다. 5월 중순 한달간의 휴식을 취하고 출전한 퍼스타 LPGA 클래식과 이어진 코닝 클래식에서 첫날 단독 선두로 나서는 호조를 보이다 두 대회 모두 후반에 무너지는 뒷심 부족을 보였다.

당시 외적인 문제는 왼쪽 겨드랑이 밑 활근 타박상 때문. 그러나 이 부상 외에 캐디와의 마찰이 큰 원인이 됐다. 김미현은 코닝 클래식에서 이틀 연속 선두를 달리다 3라운드부터 캐디와 골프화, 클럽 선택에서 계속 의견 충돌을 보이다가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김미현에 있어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 안정을 찾는 여유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3년 연속 미 LPGA투어 신인왕 타이틀을 안겨줄 주인공 박지은은 현재 스윙이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단연 세계 톱프로 수준에 있다. 그간 흔들렸던 퍼트도 안정을 찾아 우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러나 박지은은 첫 우승 다음주에 열린 웨그먼스 로체스터 인터네셔널대회 2라운드에서 어이없는 스코어를 치며 기권하는가 하면 지난주 에비앙 마스터스에서는 샷이 안되자 자제력을 잃고 클럽을 집어던지는 등 아직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박지은이 루키답게 차분히 자신을 키워가는 과정을 거친다면 타고난 장타와 샷 감각으로 미 LPGA 투어에 또 한차례 ‘코리아 쇼트’를 몰고 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20 20:35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