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100km 울트라마라톤 완주자 김태엽

달린다고 다 이봉주는 아니다. 한솔제지 장항공장의 김태엽(37). 낮엔 계측제어 보전업무를 맡은 직장인으로, 출근 전과 퇴근 후엔 마라톤에 땀을 쏟는 보통사람 김태엽이다.

전문 트레이닝이라곤 한번 받아본 적도 없다. 연습장도 회사 앞의 바닷가 도로 5km. 운동화나 체육복이 헤지면 자기 주머니에서 해결해야 하는 아마추어 마라토너.

그러나 이봉주도 황영조도 갖지 못한 기록을 그가 얼마전 세웠다. 정규 마라톤 코스인 42.195km를 두배반이나 뛰어야 하는 장장 100km의 울트라마라톤 코스를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주했다.

대회는 지난 5월11일 충남 서천군 장항읍 금강하구 둑에서 열렸다. 말이 대회이지 혼자 참가해 혼자 성공했다. 함께 출전하기로 했던 7명의 동료 마라토너가 대회 직전 모두 포기했기 때문이다.

완주시간은 14시간20분. 끝내고 나니 그만한 역사(役事)가 없지만, 뛸 때는 죽는 줄 알았다. 차라리 주위에서 말려주기를 바랬다. “그렇게 다 죽어가는 걸 보고도 어떻게 말리지 않을수가 있느냐”며 아직도 당시 레이스때 있었던 동료들을 보면 슬쩍 눈을 흘기기도 한다.

평소 신조로 삼던 ‘의연한 피니시’도 물 건너 갔다. 피니싱 테이프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절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폼이야 어쨌든 그는 해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박수를 받을만하다.


“뛸때는 죽는 줄 알았어요”

“마라톤을 하다보면 고통 속에서도 희열이 있습니다. 온 몸으로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고통을 내 힘으로 억누르고 달린다는 묘한 쾌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해도 너무했습니다. 그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마지막 80km부터 100km까지는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엔 거의 다리를 절며 들어왔습니다. 다들 ‘저러다 사람 잡겠다’고 하면서도 왜 ‘이제 그만하라’고 한마디 해주지 않는지 야속했습니다.

그 말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다들 안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할 뿐 도무지 그 말을 해주지 않는 겁니다. 저 혼자 뛰었다면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대단한 선수경력도 없다. 차라리 약골에 가까웠던 학창시절. 달리기 때도 3등 안에 들어본 역사가 없다. 오히려 병력(病歷)만 길다. 18년전 고교 졸업후 잠시 용돈벌이 삼아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가 허리병을 얻었다. 수술을 요하는 심각한 상태였다.

병원치료며 한약까지 먹어보아도 효험이 없자 허리 근육이 약해서 그런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수영을 시작한 것이 5년전. 운동다운 운동이라곤 그게 처음이다. 실제로 고통은 한결 완화됐다. 기본근력을 높이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병행하면서 상태는 더욱 좋아졌다.

무엇이든 했다 하면 골수처럼 집착하는 버릇은 수영장에서부터 나타났다. 풀 안에 들어가면 여간해선 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계속 왕복만 되풀이했다. 물에서 나오는 건 집에 가기 위해 나올 때 뿐이었다.

2년전 어느 일간지에서 ‘60대 철인 할아버지’의 기사를 읽고 자극받아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게 됐다. 수영 3.9km, 사이클 180.2km, 마라톤 42.195km, 총 226.3km에 걸쳐 진행되는 경기. 수영은 웬만큼 실력이 붙은터라 마라톤과 사이클만 연습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마라톤을 시작한 건 순전히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철인 3종경기 도전위해 마라톤 시작

처음엔 방법조차 몰랐다. 무작정 많이 달리기만 했다. 엄연히 회사에 목을 매놓고 사는 월급쟁이라 근무시간은 피했다.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는 터라 여가를 쓰기에도 좋았다.

새벽 너댓시면 일어나 공장 앞 도로 5km를 몇바퀴씩 달린 뒤 출근. 퇴근 후면 또다시 옷을 갈아입고 달렸다. 달리기에도 요령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이다. 발의 물집은 물론 발목과 무릎의 통증, 심지어 피부까지 몸 곳곳에서 고통이 배어나왔다.

요즘도 그가 마라톤 초보자를 위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체험기 속에 빠지지 않는, 잔소리같은 강조사항. 눈 보호를 위해 선글라스 착용. 노출된 팔과 다리, 목엔 수시로 선크림을 바를 것. 대퇴부 안쪽이 서로 마찰되는 걸 막기 위해선 바셀린을 발라둘 것. 신발도 쿠션이 좋은 것으로 선택. 발가락마다 테이핑을 할 것.

식염수과 포도당 외에도 초콜릿 등 고칼로리 간이식을 충분히 준비하고, 뛰다보면 발이 붓게 되므로 원래 발크기보다 큰 사이즈의 신발도 두켤레쯤 준비. 유두엔 반드시 반창고를 붙일 것. 장시간 뛰다보면 연한 유두끝이 운동복에 쓸려 몹시 쓰라리기 때문. 이것만 봐도 그동안 그가 어떤 고생을 치렀을지 짐작이 가능한 단서들이다.

목표했던 철인 3종 경기는 지난해에 달성했다. 1999년 8월 제주도 성산 일출봉에서 열린 대회. 첫 출전에 바로 철인 칭호를 따냈다. 규정시간보다 4시간여 앞선 12시간57분의 완주 기록이었다. 사내에선 담박에 스포츠 스타로 떠올랐다. 여기저기 강연요청까지 찾아들 정도였다.

울트라마라톤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건 그로부터 두달 뒤인 지난해 10월. 정보를 접한 뒤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거리를 기준으로 하는 울트라마라톤은 국제 표준 미니멈이 100km. 예전과 다름없이 휴일을 최고의 맹연습 시간으로 삼았다.

주말마다 가족이 있는 전주 집에 가서도 연습을 놓지 않았다. 아내는 드러내놓고 반대하진 않았지만 굳이 다리 부상까지 입어가며 마냥 달리기만 고집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엔 가족 보기가 미안해 스스로 계획을 수정.

낮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 뒤 정 달리고 싶으면 새벽 2-3시에 몰래 나가 뛰고 들어왔다. 식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5월. 결전의 순간을 맞았다. 국내에선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도전. 철인 석권의 경험만 있을 뿐 달리기 2년의 주자로선 자못 대담한 시도였다. 연습 때도 100km 전구간을 달려보는 일은 없었다.

본대회를 그르치지 않기위한 전략이긴 했다. 한번 100km를 뛰고나면 최소한 한달을 쉬어야 하는 것이 인간체력의 순리. 예행연습이라고 욕심껏 100km를 다 달렸다간 정작 본대회엔 오르지 못하는 수가 있다. 마치 성악대회를 앞둔 참가자가 전날 밤새 노래연습을 하다 정작 결선에선 목이 쉬어 탈락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마라톤은 인내와 절제의 스포츠다. 최고의 핵심은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는 것이다. 힘이 있을 때일수록 힘을 아끼는 법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페이스를 다스려가며 적시적소에 에너지를 안배할 줄 아는 사람만이 결승점을 볼 수 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한편의 드라마

대회 출발전. 남의 속도 모르고 옆에선 자꾸만 “자신있냐”고 물어댔다. “뛰어봐야 알 것 같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뛰기는 자기 몸이 뛰지만 제 몸조차 다 알 수 없는 것이 마라톤.

최소한 60km까지는 계산이 가능했다. 각 10km마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미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꿰뚫고 있었다. 어디쯤에서 어느 무릎이 어떻게 아플지, 어느 거리쯤에서 마라톤의 벽이라는 ‘데드 포인트’가 찾아올지 환하게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나 60km 넘어는 장막이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100km도전은 시작됐다.

“초반엔 아주 좋았습니다. 예상시간보다 30분쯤 더 일찍 코스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6km부터 고비가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도중에 용변을 보기 위해 주유소 화장실에 갔을 땐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아 벽을 붙잡고서야 겨우 앉고 일어섰습니다. 그래도 거울을 보니 아직 얼굴이 말짱하더라구요.

하지만 그다음부터 본격적으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70km 지점에선 이미 초반 레이스에서 벌어놨던 시간을 다 까먹었고 달리는 속도도 점점 반으로 줄었습니다. 도중에 심한 오한을 만나 떨기도 했고 발에 생긴 물집은 직접 가위로 찢어 터뜨린 뒤 달리기도 했습니다. 도착지점까지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달린 게 아니라 몸을 억지로 끌고간 겁니다. 골인한 뒤 사람들 표정을 보니 그들도 멍한 것 같았습니다. 요란하게 환호하기도 뭣할 만큼 제 꼴이 너무 참담했던 거죠. 정말 끔찍한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이 ‘감동의 드라마’는 김씨가 소속된 공장뿐 아니라 그룹 전체의 방송망을 타고 소개되기도 했다. 사내 방송을 통해 한 사원의 다큐멘터리가 몇십분간이나 방송되기는 회사에서 유례가 없었다.

‘목숨 걸고 열연한 드라마’의 주인공 덕분에 그의 회사엔 요즘 마라톤붐이 한창이고, 얼마전엔 한 임원의 지시로 앞으로 1년에 4차례씩 마라톤대회를 개최하기로 하는 등 부대소득이 적지않았다.


대한해협 맨몸으로 건널 계획도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것이 공식대회가 아니었다는 점. 그저 도전 자체의 의미로 실험삼아 열었던 동호회 성격의 행사인지라 공인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게 대수랴. 김씨는 여전히 건재하고 앞으로 더 강도높은 도전기회를 노리고 있다.

육상에선 일단 한숨을 돌린 덕분인지 다음 사투는 해상에서 펼칠 계획. 일찌기 조오련이 건넌 대한해협을 조만간 그도 수영으로 횡단할 생각이다. 조오련과 다른 것은 스노클이나 물갈퀴 하나없이 맨몸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얼마전에도 3시간20분만에 수영장 50m 레인을 100바퀴나 거뜬히 돌았던 김씨. 해볼만한 싸움이다. 이미 자신만의 독특한 영법까지 개발해두었다.

“조언을 얻고 싶어 조오련씨께 직접 전화를 했더니 저처럼 물어보는 사람이 워낙 많은 탓인지 ‘20km를 6시간내 완주한 뒤 전화하라’고 하더군요. 자존심 상해서라도 20km 완주 뒤에 전화하진 않을 겁니다. 아예 30km까지 끝낸 뒤 그때 연락할겁니다.”

한번 맘 먹었다 하면 확실히 매운 구석이 있다. 10여년전 직장생활 초반, 알콜 중독이나 다름없는 상습과음으로 폐인 직전까지 이른 때가 있었다. 한번 술병을 들면 정신이 나가떨어진 뒤라야 비로소 술병을 놓던 두주불사형.

엉뚱한 술버릇은 없었지만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단번에 술을 끊었다. 그 비결도 초간단. 행여 회식때라도 술을 강권할지 모를 주위 사람에게 딱 한마디 던졌다.

“나는 술만 마시면 사람을 패고 상을 뒤엎는 등 행패를 부리는 나쁜 술버릇이 있으니 알아서 권하라”는 것. 그후 지금까지 단 한사람도 술 권하는 일이 없었다. 실제론 그런 버릇이 없지만 단단히 금주를 결심한 사람은 써볼만한 노하우다.


“24시간동안 달려봐야죠”

‘100km 드라마’를 또한번 찍을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그만큼 유명해지고도 아직 몸을 떠는걸 보면 엄청 혼이 나긴 난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모두 포기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가 품은 먼 계획은 언젠가 24시간 울트라마라톤(대략 200km 예상)에 도전하는 것. 주어진 24시간 동안 얼마나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는가를 재는, 또하나의 인간한계 실험이다.

요즘도 운동화며 마라톤복 등 갖가지 소모품에 솔찮은 돈이 들어가지만 그래도 아까운 줄 모른다. 평생 도전하는 인생으로 살겠다는 김씨. 그의 도전은 언제나 ‘to be continued’일 뿐이다.


다시는 뛰고 싶지 않았던 순간

인간의 정신력과 체력의 한계극점에 도전하는 스포츠, 울트라마라톤. 미국 호주 일본 등 외국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있지만 국내에 소개된 것은 최근. 각각 시간과 거리를 기준으로 하는 두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난 5월11일 충남 서천군에서 열린 100km 울트라마라톤 완주자 김태엽씨는 그중 후자의 경우. 아직 국내엔 생소한 분야이니만큼 그의 체험담은 향후 국내 울트라마라톤의 발전을 위해서도 요긴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씨가 직접 기록한 당시 체험기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80km 지점을 넘어섰다. 양 무릎 모두 통증이 왔다. 고통과 인내의 시간들. 휴식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체온이 떨어지면서 심한 한기가 몰려왔다. 옷을 더 껴입었지만 소용없었다. 체온이 급격하게 식었다. 달리다말고 부들부들 떨자 누군가 달려와 나를 뒤에서 안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옷 가져와!” 옷을 덮었지만 폭풍같이 몰려드는 한기. 누군가 또 소리친다. “야, 어서 봉고차 불러!” 잠시후 차에 올랐다.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여기에서 그만둘 것인가, 아니면 느긋이 쉰 후 내일 아침까지 완주할것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람들은 차 밖에서 걱정스런 모습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만두라는 말이 없다. 여벌로 가져온 축구복으로 갈아입은 뒤 보온이 되겠다 싶은 건 뭐든 껴입었다. 나는 이때부터 마라토너가 아니었다.

평상복을 입고 달리는 보통사람. 그래도 한기가 한결 가셨다. 다시 달리려는데 무릎이 아파 움직일 수 없었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마라톤 벽을 여기서 만난 것이다. 지금부터는 정신력의 싸움이다. 나는 이대로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오른 무릎에 통증이 오면 왼 발에 힘을 주고 오른 발에 통증이 오면 왼 발에 힘을 주고 달렸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다시는 안한다. 정말로 안한다. 페이스 메이커의 응원이 그나마 힘이 된다. 누군가 박수를 치고 악을 쓰며 응원하는 것도 들린다. 간신히 96km 지점까지 왔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반환점에서 모두 다 힘을 내라고 응원한다. 이젠 두 발과 무릎 모두 쓸 수 없게 됐다. 최소한 무릎이 구부러지기라도 해야 달리거나 걸을텐데. 처음으로 길가에 누워버렸다. 누군가 주물러준다고 내 다리를 들어올렸다. 너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다. “아! 만지지 마세요! 그냥 나를 내버려두세요!”

그대로 누울수는 없었다. “나를 일으켜주세요!” 다시 고통을 참아가며 뛰려고 시도해보았다. 뒤뚱뒤뚱 팔자걸음으로 간신히 무릎을 편 채 달렸다. 이젠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기어서라도 가야한다.

아, 멀리 도착점이 눈에 들어온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참아야 한다. 20m 전까지 왔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웃을 것이다. 드디어 테이프를 끊었다. 하지만 웃지 못했다. 밤 9시20분. 나는 소리쳤다. “배고파요! 김밥 주세요!” 너무 힘들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마음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지만.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2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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