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그리고 아이들] 갈라선 부모, 상처받는 아이들

이혼가정 자녀들, 편견과 방치 '비행' 노출

진호(가명·18·고교2년)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초·중등학교 시절이 악몽같다. 진호는 초등학교 3학년때 아버지로부터 갑자기 “엄마는 죽은 걸로 생각하라”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그 이후로 엄마를 진짜 볼 수 없었다. 주위에서 ‘이혼’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 다음부터 진호는 세상이 달리 보였다. 친구들에 비해 뭔가 크게 부족한 것처럼 느꼈다. 엄마 손을 잡고 집에 가는 친구를 볼 때마다 너무 부러웠다.

선생님이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친구들과 싸움하는 일이 잦아졌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가출을 하기도 했고 자살충동을 느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진호는 중학교 때까지 그야말로 ‘문제아’였다. 새엄마가 데리고 온 남동생을 걸핏하면 두들겨패기도 했다.

진호는 부모가 이혼한 이른바 ‘결손가정’ 학생이다. 그래도 진호는 심각하지 않은 경우다. 대안(代案)학교인 모 고교에 입학한 뒤 마음을 잡고 지금은 모범생이 됐다. 건축설계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발표한 사법연감에 따르면 1998년 한해 이혼은 16만건이 넘었다. 이중 소송을 통한 경우가 3만8,987건이고 협의이혼은 전년대비 30.9%가 늘어난 12만3,577건이었다. 이혼이 늘어나면서 당연히 미성년 자녀수도 급격히 늘어나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1998년 한해 국내 이혼가정의 미성년자는 11만5,637명으로 나타났다. 1993년 6만5,967명에 비해 6년만에 무려 40% 이상 늘어난 수치다. 1994년 7만2,736명, 1995년 7만6,828명, 1996년 8만7,495명, 1997년 9만7,065명 등 6년동안 모두 51만5,728명으로 매년 부모가 이혼한 미성년자가 평균 8만6,000여명씩 늘어난 셈이다.


자녀들 극심한 심리적 혼란

정서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부모가 갈라지면서 미성년 자녀들은 극심한 심리적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탈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혼가정의 아이라는 주위의 편견과 가족의 방치로 인해 비행청소년이 양산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 태호(가명)가 대표적인 경우다. 태호는 학교를 다니는둥 마는둥 하고 있고 학교에서도 사실상 태호의 결석을 방조하고 있다. 너무 질렸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때 부모가 이혼한 태호는 친척의 손에 크면서 정서적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다.

태호는 학교에서 애들을 괴롭히고 말썽을 피워 수업을 하지 못할 정도였고 교사들도 포기한 상태였다. 전형적으로 사랑과 정에 굶주려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다. 학교측에서도 이같은 태호의 정서를 알고 있었지만 많은 학생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태호만을 신경쓸 수는 없었다.

서울 모 중학교의 한 교사는 “아이들 스스로 부모의 이혼사실을 교사에게 알리기를 꺼릴 뿐만 아니라 30명이 넘는 학생과 과중한 업무 등 현재 학급 관리 여건상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기는 어렵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청소년상담 전문기관인 ‘청소년 대화의 광장’ 조사에 따르면 4월 한달간 전체 상담중 부모의 별거·이혼·재혼와 관련된 상담이 무려 24.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 대화의 광장 강진구 상담원은 “이혼이 늘어나면서 청소년의 상담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며 “주위에서 조금만 신경써도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청소년이 방황 끝에 비행의 길로 빠지는 사례가 많아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부모가 이혼해 정서적으로 심한 갈등에 시달렸던 한 학생은 함께 살던 어머니의 재혼을 앞두고 발작 등 심한 불안증세를 호소한 경우도 있다고 강씨는 소개했다.


“아이는 당신이 맡아” 서로 미뤄

이혼을 하는 부모가 아이를 떠맡지 않으려 하면서부터 아이들은 상처를 받게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서울가정법원 김경대 판사는 “과거에는 서로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다투는 사례가 많았지만 지금은 서로 맡지 않으려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며“협의이혼을 하러 법원에 왔다가 자녀양육자를 정하지 못해 돌아가는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어린 자녀들이 상처를 크게 받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맡는 부모는 생계유지와 자녀양육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사회의 도움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상록보육원 부청하 원장은 “아이를 맡은 부모는 혼자서 양육과 생계유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견디지 못하고 부모가 먼저 가출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이혼가정의 미성년 자녀에 대한 대책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 가족복지·인구정책팀장은 “사회가 문제아를 사실상 양산하는 꼴 ”이라며 “이들에 대한 사회복지적 대책이 빨리 마련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팀장은 무엇보다 학교와 이웃이 편견을 버리고 이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결손가정’을 범죄의 온상인 것처럼 몰아부치고 편견을 갖는 것이 오히려 결손가정 청소년을 범죄의 길로 모는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편견이 가장 큰 문제

이에 따라 민간단체들은 ‘결손가정’이라는 용어를 ‘한 부모 가정’으로 바꾸는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6월3일 서울 장충동 여해문화공간에서 독신가족, 입양가족, 미혼모가족, 공동체가족, 재혼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이제 닫힌 가족의 빗장을 열자’는 행사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한 부모 가족의 인권선언’을 통해“한부모 가정의 자녀이기 때문에 문제아가 될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건강하고 멋있는 가족으로 봐달라”고 요구했다.

또 학교측에는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여러 형태의 가족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언론도 사회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결손가정이 문제’라는 의식을 강조하지 말고 한 부모 밑에서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긍정적 프로그램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이혼절차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부모가 이혼하더라도 자녀양육 책임을 분담하고 접견권을 확대하는 등 자녀에 대한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법원의 양육비 지급결정을 지키지 않아도 강제할 방법이 사실상 없고 자녀양육권을 넘기면 아예 남남으로 사는 관행이 문제”라며 “이혼하더라고 양육비 부담을 확실히 하고 자녀에 대한 주기적인 접견을 유도해 아이들의 정서적인 혼란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20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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