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 전쟁과 사회/김동춘 지음/돌베개 펴냄

미국 AP통신이 한국전쟁 초 미군의 양민학살을 파헤친 ‘노근리 사건’을 보도했던 지난해 9월30일. 당시 AP 서울지국에는 한국전 참전 노병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너희같은 애송이들이 전쟁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느냐”는 항의였다. 예비역 장성이 다수 포함된 이들 발신자는 미국인이 아니라 바로 한국인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한국의 명줄을 쥐었던 미군의 역할과 생사기로의 전장을 모르는 사람은 감히 당시의 개별적 사건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

한국전 발발 5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한국전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객관화했을까. AP에 항의전화를 했던 노병들의 기억 자체를 ‘권력’으로 해석하는 새로운 한국전 해설서 ‘전쟁과 사회’가 나왔다.

저자 김동춘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는 우선 한국전에 관한 기득권층의 공식기억을 의문시한다. 나아가 지난 50년간 무시되거나 흩어진 한국전 기억을 재조립하여 부활시키려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시각의 재설정을 시도한다. ‘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 또는 ‘왜 시작됐는가’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누가 무엇을 얻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한국전에 관한 담론은 거의 대부분 전쟁 책임론, 즉 ‘누가 시작했는가’에 국한돼 있었다. 남한에서는 남침론(전통주의 학설), 북한에서는 북침론이나 조국해방전쟁이 공식해석이었다.

물론 이같은 남한의 전통주의 학설은 1980년대 한때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수정주의 학설에 의해 비판받은 바 있다. 한국전 당시 미국의 정책과 노선을 비판한 부르스 커밍스의 남침 유도설이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설이다.

하지만 수정주의 학설 역시 한국전의 기원과 발발과정에만 초점을 맞춰온 기존 연구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저자는 여기에 주목한다. 한국전에 대한 담론이 책임소재에만 국한됨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냉전논리가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됐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은 전후세대 또한 일면적이고 왜곡된 전쟁상을 형성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것을 ‘예속된 앎’이라고 규정한다. 예속된 앎은 남북화합에도 역기능을 한다. 남한이 독점적인 전쟁해석을 건드리지 않은채 통일의 주역이 된다 하더라도 결코 북한주민의 정서적인 지지와 동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공식화한 한국전 인식을 깨기 위해 저자는 민중으로 눈길을 돌린다. ‘한국전이 민중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오늘날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가 그것이다.

전투가 아닌 정치적 현상, 정치적 삶의 체험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전쟁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연구서다. 민중이 겪었던 체험과 기억을 조명하기 위해 저자는 피란, 점령, 학살이란 세 가지 화두를 꺼낸다.

피란편에서는 국가체제로서의 남한, 이승만과 지배층, 민중이 각각 전쟁을 어떻게 맞이했고 대처했는지를 살피고 있다. 지배자 중심의 전쟁인식에서 피란은 ‘공산주의를 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저자는 민중에게 있어 피란을 초기단계의 정치적 피란과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생존성 피란으로 구분한다.

점령편은 북한 인민군의 남한 점령과 동원과정, 남한의 수복과정을 살핀다. 이를 통해 광복 이후 남북한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국가건설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어떻게 전쟁과 연관돼 있는가를 분석한다. 저자는 인민군이 점령지에서 성분 분류의 기준으로 친일경력을 중시한 반면, 남한은 인민군 점령하의 부역 여부를 주요 판단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학살편은 국가가 전쟁과정에서 적의 편에 서거나 적의 잠재적 지지세력이 될 수 있는 주민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다룬다. 특히 학살의 개념과 유형을 비교분석함으로써 학살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저자는 시종일관 ‘한국전이 어떻게 국가를 신격화했고, 어떻게 반공이나 사회주의를 신앙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는가’를 묻고 있다. 한국전이 한국인을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시켰다면 AP통신에 항의한 노병 역시 한국전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27 17:05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