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아노미] 북한 신드롬… 혼돈에 빠진 사회

흔들리는 냉전사고 "뭘 바꾸고 어떻게 고치나"

6월22일 국회 국방위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 몰아친 혼돈의 한 단면이 그대로 드러났다. 조성태 국방장관은 북한 정세를 보고하면서 “김정일 정권은…”, “김정일은…”이라며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정부는 물론 언론에서도 암묵적으로 합의한 ‘국방위원장’이라는 공식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의원의 경우는 가지각색이었다.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은 처음에는 “김정일에 대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그 분이…”라고 오락가락했다. 강창성 의원도 “정상회담을 한 만큼 실례가 없어야 한다”며 ‘김정일씨’라고 호칭했다가 질의 중간중간에는 ‘김일성의 아들’이라고 하는 등 왔다갔다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은 우리 사회의 뿌리를 흔들어놓을 만큼 엄청난 여파를 남겼다.

의료대란으로 잠시 잠복기에 들어갔지만 남북 정상회담은 55년간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냉전적 기초를 재편해야 할 만큼 충격을 던졌다. 양 정상은 전쟁가능성을 거의 없앴을 뿐만 아니라 통일희망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같은 일이 불과 3일만에 이뤄져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게다가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온갖 추측과 곡해의 대상이 됐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이 TV를 통해 안방까지 전달됨으로써 우리 국민은 인식에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다. ‘빨갱이’라면 ‘뿔 달린 괴물’ 정도로 믿어온 기성세대가 느끼는 혼란은 더욱 크다.


북한 열풍, 곳곳서 엄청난 변화

3세대가 함께 사는 김모(52·회사원)씨 가족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때 남편을 잃은 노모(76)는 남북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이 북한의 술수에 놀아났다. 빨갱이들은 무조건 때려잡아야 한다”고 역정을 내고 대학생인 아들(21)은 “미국과 일본에 놀아난 분단역사를 끝내고 남북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TV에서 남북 정상회담 관련 뉴스가 나오면 집안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반공표어를 외우며 자란 김씨 역시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본 뒤 흔들리고 있다.

북한관의 변화와 혼란은 비단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상회담 기간은 물론 이후에도 직장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김정일 위원장의 참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약삭빠른 장사꾼은 광고에 이용하거나 북한 물품판촉에 나서는 등 북한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있다.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북한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정부와 사회의 반감을 뚫지 못하고 대학가의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에 대해 별다른 적대감을 갖지 않았던 젊은 세대의 북한관은 우려스러울 정도로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 대학가마다 ‘북한 바로알기’ 열풍이 불고 있고 서점에서도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에 대한 서적판매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익단체들이 가장 먼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자유민주민족회의 홈페이지에는 남북 정상간 합의를 비판한 이철승 상임대표를 극단적으로 비난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자유총연맹은 23일 열린 6·25 관련 웅변대회의 주제를 화해와 협력으로 수정하도록 방침을 바꿨다.

재향군인회도 18일부터 개최한 ‘6·25전쟁 50주년 행사’의 명칭을 ‘평화통일 결의대회’고 바꾸고 행사에서 6·25 관련 노래 대신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교체했고 성명, 결의문 등에서 ‘북괴’, ‘북한 공산집단’이라는 용어를 ‘북한 당국’으로 바꿨다.


사법·교육당국 "어쩌나"

사회 분위기가 너무 급하게 변하면서 반세기가 넘게 반(反)북한 정서를 바탕으로 짜여진 우리사회의 토대가 현실을 아가지 못하고 있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이 제일 먼저 도마에 올랐다.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많은 대학에서 인공기가 걸렸지만 사법 당국은 아직까지 아무런 처벌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어 자칫 국가보안법이 사문화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한 헌법조항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시기상조’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특히 2세 교육의 기본인 초·중등학교의 교과서는 아직도 북한에 대해 냉전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있어 일선 교사들은 학생교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부 교사들은 남북 정상회담 중에 TV를 본 학생들의 당돌한 질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서울 모 초등학교의 한 학생은 “전쟁을 좋아하고 강제로 일만 시키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유머감각도 있고 화끈한 사람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한국교육개발원이 중·고교생과 대학생 2,6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북한 지도층에 대해 52.7%가 ‘경계하고 싸워야 할 적’으로 응답하고 북한 주민에 대해서는 ‘도와주고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라고 봤다.

올해부터 시작된 7차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에 북한을 적대시하는 내용을 많이 삭제됐으나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교육부는 당장 교육현장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교사들의 지도서를 개정하는 작업부터 서두르고 있다.

통일연구원 황병덕 박사는 “지금까지 통일교육이 체제, 이념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면 앞으로는 생활, 문화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자유로운 토론,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인 비교 등 열린 교육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군도 변화 불가피

국방부도 갑작스러운 화해 분위기에 북한을 주적으로 계속 유지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특히 젊은 병사들의 정신교육도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몰아치고 있는 ‘레드 아노미’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에 대한 악의적인 시각 못지 않게 환상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정보에 대한 대폭적인 공개를 통한 객관적인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이온죽 교수는 “북한에 대한 자료수집이 쉽지 않아 이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북한을 방문했던 기업인, 학자 등 직접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북한 알리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상진 원장은 “국민이 새로운 학습과정에 들어간 셈이므로 충격은 불가피하다”며 “이 과정에서 사회 전반의 해석능력이 증진된다면 오히려 남북화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27 17:21


송용회 주간한국부 songy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