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 여기자 매기 히긴스가 본 한국전쟁

"죽음을 앞둔 순간이 바로 이런 느낌"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았다. 전쟁발발 이틀만에 서울에 도착한 4명의 기자중에는 용감한 여기자가 한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가렛(매기) 히긴스.

히긴스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과 콜럼비아 언론인 전문학교를 졸업, 1942년 뉴욕 헤럴드트리뷴에서 기자로 입문한뒤 런던, 베를린을 거쳐 1950년 도쿄지국으로 발령받았다.

히긴스의 강인함은 동료기자와 병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히긴스가 1951년 퓰리쳐상을 수상하자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1951년 7월11일자에 그의 이야기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히긴스는 한국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한국전쟁-종군여기자의 일기’라는 책(Doubleday & Co 출판사, 뉴욕)으로 엮었는데 지금 이 책은 구하기가 무척 힘들다. 히긴스는 전쟁을 사실적이고 진실에 가깝게, 예리한 기자의 필치로 묘사했다.

히긴스의 책에 실린 ‘아침 식사중 적의 기습’의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히긴스는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던중 병을 얻어 1966년 46세로 세상을 떠 미 앨링턴 국립묘지에 잠들었다. <편집자주>


아침식사 중의 기습

6명 가량의 연대장교와 마틴(동료기자), 그리고 나는 어떤 학교 건물 안에서 전시(戰時)의 식사로서는 제법 풍성하다 할 만한 아침식사(마른 계란가루와 뜨거운 커피)를 마련하고 있던 참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총탄이 창문 유리를 깨뜨리며 쏟아져 들어왔고 파편은 얇은 벽을 뚫고 나갔다. 책상에 놓여있던 커피포트가 기관총 총탄을 맞고 튕겨날았다. 내가 침대로 사용하던 나무판자는 수류탄 세례를 받고 산산조각이 났다.

또하나의 수류탄은 천장을 박살내버렸다. 윌리엄 호크 대위는 “어디서 쪼끄만 녀석들이 우리를 쏘아대는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수류탄 파편을 맞고 찢어져 피가 나는 오른 손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복도를 통해 아래쪽으로 피신하려고 했지만 마루바닥에 찰싹 엎드려 누워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는 갑작스런 기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해 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총탄은 우리 뒤의 언덕 쪽에서도, 반대편의 운동장 쪽에서도 날아왔다. 무수한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건 적이 쏜 총탄일 수가 없다. 우리는 전방에서 수마일이나 떨어져 있지 않은가. 수류탄은 15~20m의 거리에서 던져졌을 것이다. 적이 어떻게 그렇게 가까이 올 수 있단 말인가. 맙소사, 그렇다면 적은 교사(校舍) 바로 뒤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몇초 후면 적이 창문을 뛰어넘어 들어와 우리를 덮칠 것이다. 제기랄, 우리에게는 카빈총 한정 조차 없는데. 카빈총이 있다한들 이미 너무 늦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상황에 뛰어들었단 말인가. 주변을 경비하던 수비대는 어떻게 된거지? 화가 난 미군 병사 몇명이 홧김에 총을 쏘아대고 있는 건 아닐까?”


병사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 총알들은 적군이 쏜 것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적군(赤軍)은 야음을 이용하여 아군의 전선을 뚫고 침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들은 간선도로를 피하고 산길을 걸어 방비가 허술한 협곡에 도달했다.

이 협곡은 우리와 우리 북쪽에 주둔하던 35연대 사이에 놓여 있었다. 위장복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의 일부는 학교 뒤편의 언덕 쪽으로 침투했고 다른 일부는 우리를 우회하여 학교 반대편의 논에 기관총을 설치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우리를 덮친 교차사격은 이렇게밖에 설명될 수 없었다.

그들이 아군의 방어선 안쪽으로 침투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지역의 방어를 맡았던 미군 병사들은 전날 30km에 이르는 적진 진출작전을 수행한 터라 완전히 지쳐있었고, 그들중 일부는 잠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경비를 담당하던 미군 장교들은 적어도 1개의 적 편대를 한국경찰로 오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잠에 빠진 미군 병사들은 공산군의 공격을 받자 미처 무기를 손에 쥐기도 전에 다수가 부상당했다. 물론 내가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더러운 학교 바닥에 코를 처박고 있던 나는 총알이 빗발치는 이 학교를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갑자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전날 붙잡힌 3명의 북한 군인이 복도의 맞은 편 구석에서 지치고 더러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몸부림치면서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마치 다친 강아지가 내는 낑낑거리는 소리 같았다. 그중 한명이 눈을 가렸던 붕대를 풀고 문 쪽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총격이 너무 격렬했다. 동료 공산군 병사의 총탄이 그의 탈출을 방해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한번 그들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들은 죽어 있었다. 그들의 시체 아래로 피가 고여있었고 피는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총탄은 마분지처럼 얇은 벽을 관통하여 파고들었고 우리 주변의 마루바닥을 마구 찢어놓았다. 아직 우리 가운데 한명도 총상을 입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는 해럴드에게 “우리가 미국 시민에게 너무도 생생한 전투보도를 하게 된 것 같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해럴드는 내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갑자기 장교 중의 한 사람이 소리쳤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라고 외쳤다.

그는 창문을 넘어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우리 모두 그를 뒤따랐다. 우리는 적어도 언덕 쪽에서 날아오는 총탄은 막아줄 수 있는 돌 벽을 발견했다. 운동장에서는 장교와 하사관들이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총탄을 피하려 하면서도 이 혼란 속에서 조금이나마 전열을 다듬고자 부하들을 모으려고 했다.

운동장에 있던 몇몇 병사들은 제정신을 잃고 아무렇게나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들은 언덕에서 후퇴해 내려오던 다른 미국병사들을 거의 맞힐 뻔했다. 그들 대부분은 맨발로 도망쳐오고 있었지만 한손에는 총을 잡고 다른 한손에는 군화를 꽉 움켜쥔 채 달려오는 병사들도 있었다.


미친 듯이 총을 쏘다-아군을 향해

연대장 미카엘리스와 중대장은 지프와 트럭 아래에 숨어서 전투를 피하고 있는 병사들을 발로 차면서 어서 뛰쳐나와 언덕 쪽의 자기 부대로 복귀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학교 반대편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그 소음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한 미군 병사가 아군 기관총 사수를 향해 조준하는 것을 목격했다. 총알은 명중했다. 이 정확한 발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 기습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진 그 기관총 사수는 미친 듯이 아군의 차량과 병사들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는 냉혹하고 끔찍한 확신을 전쟁중 처음 느껴보았다. 나는 피할 길 없이 닥쳐오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흔히 반응하는 그대로 반응했다. 나는 왜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닥쳐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사태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고, 그러자 조금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더이상 초조해 하지 않았고, 이빨이 덜덜거리던 것도, 손이 떨리던 것도 멈추었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덜덜 떠는 모습을 누구에게 보이는 건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마이클리스가 구원자처럼 나타나 내게 물었다. “괜찮소, 아가씨?” 나는 제법 태연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다. “끝내주는 걸요!”

몇분후 마이클리스는 갑자기 쏟아지는 총탄을 무시한 채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서서 소리쳤다. “전열을 가다듬고 목표물을 결정하라!”아군은 차츰 혼란상태를 벗어나 방어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두개조의 중기관총 편대가 엄호사격을 받으며 언덕에 도달했고, 언덕 아래로 몰려오려는 적을 향해 발사하기 시작했다. 유탄발사기도 투입되었다. 대포도 포관을 내려 불과 몇백m 앞의 적을 향해 발포했다.

총성이 조금 누그러들자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언덕에서 업고 내려왔다. 유탄발사기는 학교 건물 끝편에 있는 구호소의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었고 의사와 위생병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동안에도 계속 굉음을 퍼부어 대었다.

구호소쪽으로도 계속 총탄이 날아왔고 의사들과 위생병들은 총탄을 피하기 위해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작업해야 했다.


“격퇴”되는 공산군들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부상자가 생겼기 때문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한 위생병은 혈장이 바닥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디선가 혈장이 다시 구해질 때까지 부상병들을 그냥 놓아둘 수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혈장을 투여하는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약 한시간 가량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다.

이 전투에서 내가 경험한 가장 멋진 사람은 로건 웨스톤 대위였다. 그는 다리를 다쳐 쩔뚝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붕대가 다 감겨지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언덕 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30분후 그는 다시 어깨와 가슴에 총상을 입고 구호소를 찾았다.

그는 구호소 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고 나서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모르핀 주사를 맞으면 좋겠군요. 조금 전 생긴 구멍 두 개가 아파 오기 시작하네요.”

구호소에서 나는 우리가 여기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구호소로 실려오는 부상자들은 공산군들이 격퇴되고 있으며, 바야흐로 그들이 후퇴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짤막한 휴전상태가 찾아왔다.

조금후 지원군들로 보강된 적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카엘리스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오후 1시반 적의 마지막 공격이 격퇴되었고 학교 건물 뒤의 언덕에는 600구 이상의 북한군 시체가 널려 있었다.

입력시간 2000/06/2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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