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가평가제… 돈줄 더 막히려나

지난 외환위기때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가 한국의 경제시스템이 후진성을 면치 못하다는 평가를 내린 가장 큰 이유는 두가지다. 첫 번째는 금융기관이 대손충당금을 100% 쌓고 있지 않아 거래기업 부도로 대출금 회수가 어려워져도 회계장부상으로는 건실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회사채를 비롯한 채권을 시가로 평가하지 않고 장부가로 평가해 기업연쇄부도로 매입한 채권이 휴지조각이 돼도 투신사는 부실이 없는 것처럼 인식됐다는 점이다.

따라서 IMF, IBRD에서는 최우선적으로 금융기관 대손충당금 100% 적립과 채권시가평가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정부는 은행의 부실을 한꺼번에 털어내기 위해 대손충당금 완전적립요구를 받아들였으나 채권시가평가제 전면시행을 보류했다. 은행구조조정도 벅찬데 투신사 구조조정까지 같이 하면 투신사 부실공개→수익증권 환매→증시 및 회사채 시장 붕괴→금융시장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주요 근거로 내세웠다.

이처럼 메가톤급 폭발력을 가진 채권시가평가제가 드디어 7월부터 시작된다.

이 제도는 말그대로 펀드에 편입된 채권을 매일매일 변하는 시장가로 평가함으로써 금리변동의 영향에 따라 펀드의 실제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채권수익률과 금리는 반비례

먼저 채권가격과 금리는 반비례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채권금리는 기업의 미래현금 흐름과 상환능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금리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투자위험이 높다는 것이고 시장에서는 가격하락으로 나타난다.

예를들어 같은 3년만기 회사채라 하더라도 삼성그룹 계열사 채권은 부도가능성이 낮아 시장에서 사려면 비싼 값을 줘야 하지만 중소기업채권은 아무래도 부도위험이 높아 싼값에 살수 있다.

채권시장도 수요-공급에 따라 움직이는 시장이기 때문에 가격이 매일 변한다. 즉 어떤 기업의 자금사정이 악화되면 부도위험이 높아진 것이기 때문에 채권가격은 내려가고 사정이 좋아지면 반대로 가격은 올라간다.

시가평가제는 이렇게 실제로 변하는 채권가격으로 펀드를 평가하는 것이다.반대로 지금까지 시행해온 장부가펀드는 처음에 투자자가 펀드에 가입해 매입한 채권금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투신사가 채권운용 실적이 좋아 보장수익보다 높은 이익을 내면 회사가 갖고 반대로 운용을 잘못해 손해가 나면 회사 돈으로 물어줬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어떤 펀드에 가입해도 예정수익을 낼 수 있다.

투신사가 부실해진 것은 사실 대우그룹 부도로 투신사 펀드에서 갖고 있는 대우계열사 회사채가 휴지조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시가평가를 미리 했다면 손해본대로 투자자들에게 돌려주면 되지만 장부가로 평가하기 때문에 부도와는 상관없이 원리금을 물어줘여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정부는 대우사태 이후 투신사의 이러한 모럴해저드(도덕적해이)를 없애고 단계적 시행을 위해 1998년11월15일 이후 설정된 펀드에 대해서는 이미 시가평가제를 적용하고 있다.


7월1일 이후 유입된 자금부터 적용

7월1일부터 시가평가제가 전면시행된다고 해도 1998년11월14일 이전에 설정된 펀드는 장부가로 평가하되 다만 추가로 돈을 모집할 수는 없다.

이 펀드중 고객이 매달 펀드에 적금형식으로 돈을 내는 적립형펀드는 7월1일 이후 유입된 자금부터 시가평가를 적용하고 6월말까지 유입된 자금으로 매입한 채권은 장부가평가를 유지한다.

문제는 채권종류는 1만개나 되는데 하루에 거래되는 종목은 평균 200~300개에 불과해 증권업협회가 매일 제공하는 채권수익률표와 시장가격간에 괴리가 생긴다는 점이다.

정부는 채권수익률제공업체 2~3개를 인가해 투신사에서 자율적으로 수익률지표를 선택해 시가로 평가하도록 했다. 단 채택한 기준을 끝까지 사용해야 한다. 투신사가 3~4개 지표중 자기에게 유리한 가격만 선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6월17일 현재 투신사 신탁상품 수탁고는 총 143조원으로 작년말보다 46조원이나 줄었다. 이중 장부가평가 대상금액은 76조3,520억원(MMF 28조9,608억원 포함), 시가평가대상금액은 66조6,449억원(46.6%)으로 추정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가평가대상은 점점 늘어나 6월말에는 60%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안전성 중시, 은행권으로 돈 몰릴 듯

그렇다면 이 제도가 자금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이제 채권형펀드도 확정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운용을 잘못하면 주식형펀드처럼 원금을 손해볼 수도 있기 때문에 안전성을 중시하는 투자자들은 은행권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동안 채권형펀드에 가입하는 고객들은 은행 정기예금에 가입한다고 생각해왔다.

벌써부터 국민, 주택, 신한, 한미 등 우량은행에는 자금이 몰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다. 앞으로는 채권형펀드마다 운용성적이 달라지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고수익을 내는 펀드를 찾아갈 것이고 이는 투신사간 경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채권형펀드는 크게 안정형과 성장형으로 분류된다. 안전형은 수익률보다 안전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금리가 약간 낮더라도 안전한 국공채 및 통화안정증권, A등급 회사채만 매입할 것이다.

반면 성장형은 ‘고위험 고수익’을 추구해 금리가 높은 BBB 등급 이하의 투기등급 채권에 주로 투자할 것이다. 고객들은 이 가운데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선택해야 한다.

대체적으로 고객들의 취향은 안전형 쪽으로 기울고 있어 중견기업의 회사채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좀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증시. 현재 주가가 지지부진한 것은 기관투자자의 핵심인 투신사들의 매수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작년동안 증시를 떠받치며 밀어올렸던 투신사는 구조조정에 따른 불안감으로 투자자들의 수익증권 환매가 급증하면서 어쩔 수 없이 주식을 내다 팔았다.

펀드에 주식이 1주라도 들어가 있으면 주식형펀드로 분류되기 때문에 채권형펀드 뿐만 아니라 주식형펀드의 환매도 당분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시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는 은행으로 빠져나간 투신사 자금이 은행 금전신탁을 통해 다시 증시로 유입돼 주식을 사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장세전망이 너무 불투명해 이 자금이 다시 증시로 유입될지는 미지수다.

채권시가평가제는 이러한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한단계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이를 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미래 금융선진화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김두영 동아일보 금융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27 20:1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