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⑭] 후조쿠(風俗)①

1948년에 제정된 일본의 풍속영업법은 각급 음식점과 술집, 캬바레와 나이트클럽, 전자오락실, 파칭코, 마작방 등을 통털어 ‘후조쿠에이교’(風俗營業)라고 규정했다.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영업이라는 뜻이니 제대로 된 조어라면 ‘반풍속 영업’이 돼야 했다.

요즘 일본인은 음식점이나 간단한 소주·맥주집, 오락실이나 도박장 등을 후조쿠에이교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법률이 성풍속 특수영업으로 규정한 섹스 산업만을 가리키는데 쓰고 있다. 대개는 줄여서 그냥 ‘후조쿠’라고 하고 여성 종사자를 ‘후조쿠조’(風俗孃)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아이들 키우기가 겁난다’는 말도 실은 이 후조쿠조의 범람 때문이다. 유흥가가 아니더라도 조금 번화한 길을 걷다 보면 으레 전봇대에 붙어있거나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들고 있는 야릇한 선전 간판과 마주치게 된다.

영업내용을 알 수 있는 사진이나 그림, 약도와 전화번호, 자랑거리를 알리는 선전 문구 등과 함께 ‘특별 할인’, ‘신용카드 환영’, ‘영수증 발행’ 등이 적혀 있다. 번화가의 공중전화 박스에는 아랫도리만을 살짝 가린 후조쿠조의 모습과 전화번호를 담은 손바닥만한 스티커가 닥지닥지 나붙는다. 더러는 지하도 입구 계단의 손잡이에도 줄줄이 붙어있다. 아파트 편지함에까지 매일같이 투입된다.

이런 현상이 일본의 성풍속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매춘의 만연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더욱이 매춘의 범람이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일본은 오랫동안 공창(公娼)제도를 유지해온 나라다. 공창을 사창(私娼), 즉 밀매춘과 구별하는 기준은 운영 주체가 아니라 당국의 인허가 여부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매춘을 인정한 바 없지만 일제 식민지 시대는 유일한 예외였다.

일본의 전통적 공창인 ‘유카쿠’(遊郭·遊廓)가 한반도에 이식됐다. 해방후에는 사라졌지만 유곽이라는 일본식 조어나 공창과의 대비에서나 가능한 ‘사창가’라는 말이 지금도 그 잔재로 남아있다.

일본 역사상 유카쿠의 설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절인 15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유카쿠는 오사카(大坂·현재는 大阪)의 시마노우치(島之內)에 설치됐다가 나중에 도톰보리(道頓堀), 다시 신마치(新町)로 옮겨졌다.

이어 1589년에 교토(京都)에도 유카쿠가 설치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집권이후 에도(江戶·현재의 東京)를 비롯한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신설 허가가 금지된 1650년경에는 전국에 25개소의 유카쿠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유카쿠의 설치는 밀매춘 단속과 세금 징수의 편의도 고려한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반 사회와의 격리를 노린 것이었다. 유카쿠는 ‘유리’(遊里), 또는 ‘이로자토’(色里)라고도 불렸지만 ‘구루와’(郭·廓)라는 고유어가 널리 쓰였다.

‘일정 구역을 외부와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울타리’를 뜻하는 말로 주로 ‘성의 둘레에 흙이나 돌로 쌓아올린 방벽’을 가리키는데 썼던 ‘구루와’(曲輪)에서 나온 말이다. 격리된 특수 지역인 유카쿠가 성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 변두리에 주로 설치된 유카쿠는 주위를 담이나 도랑으로 둘렀다. 출입구도 한개만 두었다. ‘유조’(遊女)는 유카쿠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가마나 마차도 탈 수 없었다. 도망치거나 밖에서 밀매춘을 할까봐서였다.

유카쿠의 이용은 비용이 비쌌던 데다 나름대로의 격식이 강조되는 바람에 서민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단속의 틈을 비집고 밀매춘이 성행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지위를 잃어갔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숙박업소나 사창가에도 면허를 내주어 유카쿠의 확대를 꾀한 것도 밀매춘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 결과 1924년 일본 전국의 유카쿠는 545개로 불어났고 1만1,200개 업소에서 5만2,200명의 공창이 일할 정도로 번창했다.

유카쿠를 없애자는 ‘하이쇼’(廢娼)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46년 1월 공창 폐지령이 발동될 때까지 유카쿠는 살아남았다. 군대의 존재가 주된 방패막이였다.

일본군의 유카쿠 옹호는 전국시대 무장이 몸종을 겸한 유녀를 진중(陣中)에 두었던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2차대전 당시 가는 곳마다 위안소를 설치하고 갖은 방법으로 위안부를 동원했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계속>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6/28 11:36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