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담보한 유로피안 드림

중국인 밀입국자 떼죽음, EU 국가의 새로운 사회문제로

6월19일 영국 도버항의 트럭 적재함에서 발견된 중국 밀입국자 떼죽음 사건이 유럽의 최대 현안으로 급부상했다. 때마침 포르투갈 페이라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 참석한 각국 정상은 즉각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반인륜적 사건”이라고 공분을 표시하고 “연계된 범죄조직을 뿌리뽑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역시 중국인 밀입국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프랑스의 장-피에르 슈벤느망 내무장관은 프랑스가 EU 의장국이 되는 7월부터 밀입국 조직과의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숨진 밀입국자 전원이 지난 4월 벨기에 당국에 의해 체포돼 추방됐다가 영국에 다시 밀입국을 기도한 사실이 새로 드러나면서 EU권의 안이한 밀입국자 처리 방식과 범죄정보 교환부재 실태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영국 당국은 자신의 나라만 아니면 밀입국자들이 어디로 가든 상관하지 않는 자국 이기주의가 불법 이민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 EU내의 갈등이 고조될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럽의 언론들은 연일 수사속보와 밀입국과 연계된 범죄조직, 참혹한 밀입국 실태, 밀입국 방지대책 등을 심층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냉동적재함서 58구의 시신 발견

도버항에서 세관검사를 받던 트럭의 냉동적재함에서 58구의 중국인 시신이 발견된 것은 지난 19일 오전. 이 트럭은 18일 벨기에 제브루헤항에서 선박에 실려 이날 자정께 도버항에 도착했다.

하역과정에서 트럭을 검사하던 세관원이 발견한 시신은 대부분 20대 남자였으며 여성도 4명 포함돼 있었으나 어린이는 없었다. 영국 경찰은 “사망자들이 모두 중국 남부 푸젠(福建)성 출신”이라고 발표했다. 생존자는 남자 2명으로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벨기에를 출발한 트럭에 타고 있던 사망자들은 이날 영국이 연중 최고기온인 30도를 기록했던 점으로 미뤄 더위와 산소부족으로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버 인근 켄터베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생존자들은 경찰에게 “같이 있던 사람들이 질식해 숨져가는 모습을 보며 컨테이너 문을 두드리고 발로 차며 구조를 요청했지만 아무도 열어주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잠긴 문을 열기위해 부딪히며 안간 힘을 쓰다가 온 몸에 멍이 들어 울부짖으며 죽어갔다”고 끔찍했던 순간을 전했다.

토마토 운반차량으로 신고된 트럭의 냉장실은 당시 스위치가 꺼져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당국은 “목격자가 현장에서 받은 충격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혀 발견 당시 적재함 내부가 얼마나 참혹한 상태였는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영국의 동남부에 위치한 도버항은 벨기에 프랑스등과 대형 페리선의 항로가 연결된 곳으로 동유럽으로부터의 불법이민자와 망명객이 몰리는 곳이다.


중국이민 알선조직 대대적 수사

영국과 중국, 네덜란드 경찰은 이번 사건의 배후로 추정되는 중국이민 알선조직에 대한 합동 수사에 착수했다.

이미 영국 경찰은 사건 당일 길이 15m의 흰색 벤츠 트럭을 운전했던 네덜란드인 운전사를 현장에서 체포했다. 영국 당국은 “트럭 운전사와 2명의 생존자가 밀입국 조직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며 “유럽대륙 각국과 공조를 통해 사건경위 및 밀입국 알선조직에 대해 면밀히 수사중”이라고 말했다.

벨기에 제브루헤항에서 도버까지의 트럭경로에 대해 영국과 공조 수사를 벌이고 있는 네덜란드 경찰도 사건과 관련된 네덜란드인을 검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 네덜란드인의 신원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트럭 소유주로 돼 있는 아르잔 반 데르 스펙이라는 24세의 네덜란드 건설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이 트럭이 지난 주에 명의 이전된 점으로 미루어 범죄조직이 사전에 밀입국용으로 준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은 또 매년 수만명의 중국인을 1인당 최고 6만 달러까지 받고 밀입국 시키는 전문조직 ‘스네이크 헤드’(蛇頭)가 이번 사건에 연루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푸젠성 출신인 생존자 2명도 영국 경찰에게 “질식사한 대부분의 사람이 영국에 밀입국하기 위해 중국의 폭력조직인 스네이크 헤드에게 1만5,000 파운드(2만2,680 달러)가량씩을 내고 밀항선을 탔다”고 말한 것을 전해졌다.


중국-동유럽-트럭이용 밀입국

밀입국자들은 중국에서 항공편으로 동유럽에 간 뒤 주로 트럭 적재함을 이용, 밀입국을 시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이민당국의 한 관계자는 “밀입국 중국인의 99%가 푸젠성 푸저우(福州) 출신으로 알선조직에 1인당 2만 파운드(한화 3,500만원)씩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밀입국에 성공하더라도 중국인 갱조직 트라이어드(三合會)에 가입하도록 협박받고 있으며 본국의 가족도 엄청난 몸값 지불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유럽내 전체 불법 이민자는 300만명에 이르며 매년 50만명이 국경을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은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과 독일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올해 발간된 IOM 보고서는 전세계적으로 1억5,000만명에 이르는 이민자 중 1,900만~3,800만명이 불법이민자일 것으로 추정했다.

중국인들은 시기적으로는 계절풍이 불기 직전인 5월과 6월초 사이에 대거 밀항을 시도하는데 국영기업의 도산이나 구조조정으로 인한 해고 등으로 일자리를 잃고 돈을 벌기 위해 유럽행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이 밀입국을 위해 알선조직에 지불하는 돈은 연간 3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영국에 25만명, 프랑스에 20만명 등 유럽 전역에 약 80만명의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인 불법체류 갈수록 늘어

프랑스도 최근 몇년간 중국인 입국자 수가 급증, 새로운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1998년 2,000명이던 중국인 난민자격 신청자 수는 지난해 5,000명으로 2배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난민자격을 부여받은 중국인은 신청자의 2%에 불과하다. 프랑스로 밀입국하고 있는 중국인의 20%가 랴오닝(遼寧)성, 헤이룽장(黑龍江)성, 산둥(山東)성 출신으로 이 지역은 주요 국유공장의 도산이 가장 심각한 지역이다.

재불 중국인 단체들은 “중국인 대부분이 관광비자로 입국해 난민자격을 신청하고 있으며 입국과정에서 브로커에게 빚을 지고 있어 귀국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불법체류 중국인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빈곤에 허덕이다 범죄 등 일탈행동을 해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프랑스 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불법체류 중국인 수는 20만명이며 이중 7,000명이 파리에서 머물고 있다.

이창민 파리특파원

입력시간 2000/06/2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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